언어의 장벽, 메뉴판

영어가 반가운 순간

by 정담아

“여기서는 메뉴를 읽을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가우디 투어를 할 때 만났던 한국인 일행이 하소연을 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부부였는데 독일어는 당연히 수준급이었고 영어도 제법 유창한 편이었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유독 소통이 어렵다고 했다. 특히, 식당에서 메뉴판에 영어가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아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던 내 귀에 점점 그들의 절규가 맴돌았던 건 메뉴판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외국어 앞에서는 언제나 매우 수줍고 아주 착한 자아로 바뀐다. 그나마 조금의 소통이 가능한 영어 앞에서도 그러는데 스페인어 앞에서는 그 정도가 극도로 치달았다. 일단 식당에 들어서면 배시시 웃으며 “올라”를 던지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직원이 다정하게 건네주는 메뉴판을 수줍게 받아 들었다. 내가 느끼는 다정함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가 내민 물건은 대부분 내게 매우 불친절했으니까. 처음에는 일단 확실하고 자신 있는 “sangria”를 작게 속삭인 뒤 식사 메뉴 고를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식사가 반복되고 다른 음료를 향한 열망이 크게 부풀어 오를 때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맥주를 뜻하는 단어들을 빠르게 습득했다.


샹그리아 외의 다른 음료를 처음 주문하려는 그 순간, 조금 망설여졌다. 과연 이 음성이 상대에게 제대로 닿을 수 있을까. 혹시 그에게도 내 서먹함이 전해져 생경한 말로 느껴지는 건 아닐까. 처음 만나는 단어들과 나 사이의 어색함을 빼내기 위해 홀로 여러 번 단어를 입 속에 굴려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낯선 단어를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그 순간에도 확신이 없었다. 과연 제대로 발음한 게 맞을까? 알아 들었을까? 부드럽게 끄덕이는 식당 직원의 미소를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내 앞에 전해진 술잔은 유독 아름답고 달콤했으며, 조금은 짜릿했다. 그 후로 식당에서 나의 수줍음은 조금 걷혔다. 와인, 맥주와 같은 주류를 주문할 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음식 메뉴는 여전히 문제였다. 아직 멍청한 구글 번역기의 메뉴 번역은 형편없었다. 결국 메뉴판 상세 설명에 적힌 단어들을 일일이 입력하면서 자체 번역을 시도했지만, 문화적 배경 지식이 없는 우리에겐 그냥 식재료의 나열일 뿐이었다. 어쩌다 영어 메뉴판을 마주할 때도 비슷했다. 영어를 보고 매우 반가워했지만 막상 영어 메뉴판은 우리의 반가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순대를 영어로 ‘sundae’라 쓴다 한들 외국인이 어찌 알겠으며, 나름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korean sausage’로 표기한들 음식의 맛과 이미지가 얼마나 구현될까.


결국 우리가 사용한 건 가장 원초적인 방법들이었다. 외계어 같은 메뉴판을 보며 그냥 느낌으로 고르기, 메뉴판과 상관없이 인터넷에서 캡처해 둔 사진을 직접 보여주기, 가져갔던 책의 그림이나 사진을 들이밀기, bar 자리에 앉아 보이는 음식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물론 성공했던 적도 있고, 실패했던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맛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마다 몹시 실망스러웠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이곳에서, 실패한 메뉴를 먹다니! 속상함을 속상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속상했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를 날렸다는 아쉬움이 가득 차올랐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대해졌다. 나는 이곳에 다시 올 거니까. 반드시. 물론 안 좋은 기억력으로 실패했던 메뉴를 또 시킬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분명 다른 맛일 거다. 첫 번째의 여행의 추억이 훌륭한 감미료가 되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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