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담아 Jun 10. 2022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땐, 낙지볶음밥과 김치 메밀전

관행에 질문을 던지는 우매한 나를 위한 식단

정신없이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갑자기 비보가 날아왔다. 위에서 방과후 수업을 시작하란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방과후 수업이며, 야간 자율학습이며 다 없애라는 시기였기에 뭔 개소린가 싶었지만  관리자의 의지는 확고하다고 했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떠오르는 궁금증이지만 관리자가 되면 뇌가 없어지는 걸까, 뇌가 없는 인간들만 관리자가 되는 걸까. 그들의 뇌구조는 대략 이러했다. 

'방과후 수업을 열어라. 야자도 진행해라. 그리하여 상위권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라. SKY에 보내라.'


본인 자식들은 학교 방과후 수업과 야자로 대학을 갔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 질문의 기회가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나를 포함하여 뒤에서 구시렁대는 반발은 많았으나 앞에서 전면으로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므로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고 나는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진행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문제였다.


교과 회의에서 우리 교과에서 오픈하는 모든 방과후 수업의 요일과 차시를 맞추자고 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몇 차시 수업을 해봤자 의미도 없으니 나는 여름방학까지 길게 보고 진행하겠다고 했다. 안 된다고 했다. 방학 때까지 어찌 될지도 모르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럼 요일은 내가 마음대로 정하고 싶었다. 안 된다고 했다. 하나로 통일하자고 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나 싶었는데, 요일이 겹쳐야 아이들이 우리 수업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아... 내가 멍청했다. 여러 과목을 다 듣게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한 요일로 몰아야 하냐고 물었던 나의 말이 우문이었다. 결국 나만 제외하면 모두 한 요일로 몰자는 의견이었기에 나 역시 같은 요일로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래 좋다, 대신 담당 교사들 이름을 걸고 수업을 개설해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교사 이름을 공지하면 안 된다고 했다. 대체 왜? A교사 수업을 들고 싶어서 그 과목을 신청했는데 B교사가 들어오면 얼마나 싫겠냐고 했더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왜? 왜 그게 어쩔 수 없는 거지? 아니 다 안 된다고 할 거면 대체 왜 회의는 하자는 건데? 이게 회의긴 하니? 대체 왜 교과끼리 맞춰야 하는데? 왜 뭐만 얘기하면 튀지 말라는 건데? 방과후 수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보다 아무런 소통 없이 밀어붙이기만 하는 방식에 화가 치밀었다. 나대는 사람 취급하며 제발 닥치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도 짜증이 났다. 무엇보다 담당 교사로서 아이들이 물어오는 질문에 명확한 해명을 내놓을 수 없음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날들이 수없이 많아 매일 매운 음식이 당기긴 하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분노하는 날이면 반드시 매운 걸 먹어줘야 한다. 다행히도 그날의 메뉴는 날 위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낙지볶음밥. 주말에 먹고 남은 낙지볶음에 밥과 김, 참기름을 넣고 볶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아침에 갓 볶았을 때의 영롱함을 잃어 소화 불량자의 핏빛처럼 거무튀튀했지만 향은 여전했다. 이건 맛이 없을래야 맛이 없을 수 없는 법. 바다 내음이 은은하게 물든 고추장 양념에 기름, 탄수화물이 만났는데 실패할 리가 없지! 


맵쌀함 속에 달큰한 기운이 스며있고 그 모든 것을 고소한 향이 아우르고 있었다. 엄마표 특유의 맵단 콤보가 입안에 퍼졌다. 양념에 한껏 뒹군 밥알을 씹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잽싸게 사이드 메뉴를 집어 들었다. 자학으로 이 분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나의 속을 달래기 위해서는 기름기가 필요했기에. 자고로 음식엔 궁합이 중요한 법. 이것이 우리 집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다. 매운 낙지볶음과 함께 먹으라며(그게 아니어도 늘 습관처럼 무언가를 뚝딱뚝딱 부쳐내는 분이긴 하지만) 전날 엄마가 부쳐내었던 김치 메밀전. 씹을수록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맵지만 달콤하고, 씁쓸하지만 고소한 기운이 퍼지는 오묘함 속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나의 오늘도 맵고 쓰지만은 않을 거라는.

매거진의 이전글 순한 여름의 맛, 가지 간장 국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