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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May 30. 2022

순한 여름의 맛, 가지 간장 국수

회색빛 노예 삶에 핑크빛 즐거움 더하기

“하아... 노예 소야.”

내 말을 듣던 동료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것이 ‘먹고 자고 일하고...’를 무한 반복하는 나의 삶을 표현하기 가장 좋은 단어였다.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시간이 단 한순간도 없는 것만 같았다. 내가 ‘내’가 되어 일하는 찰나도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싶었다. 문제는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탓에 ‘나’로서의 삶의 바퀴를 굴릴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었다, ‘나’로. 소비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 내가 ‘내’가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요리였고, 도시락이었다. 


평범한 삶을 열망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릴 때였다. 무의미하게 온라인을 떠돌다가 행복해지는 법, 그런 류의 글을 보았다. 행복을 위해 애쓰는 몇 가지 방법이 나왔는데, 그중 하나가 요리였다. 그때의 문장이 내 오랜 기억 한 귀퉁이에 먼지가 쌓인 채 구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에너지가 바닥나기 전인 주초반 혹은 주말에 아무도 없는 빈 주방에서 온전히 내가 주체가 되어 창작행위를 펼칠 수 있는 요리를 하곤 했다. 주로 메뉴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에 따라 결정이 되곤 했는데, 마침 집에는 영롱한 보랏빛을 내뿜는 여름 맞이 가지가 몇 개 있었다. 


가지를 3등분을 자른 뒤 세로로 길게 잘랐다. 팬에 기름을 두른 뒤 다진 마늘을 넣고 달달 볶았다. 알싸하고 앙칼진 마늘이 기름과 만나 유해진,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짜낸 가지와 총총 썰어둔 고추를 넣고 볶았다. 간장을 살짝 넣고 몇  차례 더 휘저었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 처음 만나게 된 이 재료들이 불의 힘을 빌려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열기를 살짝 식힌 뒤 도시락 통에 담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가지볶음을 넣어두었던 도시락 통을 꺼내 그 옆에 삶은 면도 넣었다. 내가 일하는 오전 동안 퉁퉁 불어날 게 걱정되어 참기름을 조금 발랐다. 그리고 간장, 참기름, 설탕 조금을 넣어 간장 양념을 준비했다. 갑자기 출근길이 조금 설레었다. 그럼에도 당장 출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다면 기쁘게 도시락을 집에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질질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면서도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도시락 보따리 덕에 조금 든든했다. 도살장에 끌려가지만 마지막으로 발악할 수 있는 무기를 하나 장착한 느낌이랄까. 


막상 직장에 도착해서는 도시락에 대해서 떠올릴 틈조차 없이 바빴고,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나의 얼굴에 볕이 드는 순간이랄까. 재빨리 도시락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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