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담아 Apr 13. 2022

알록달록한 맛의 위로, 토마토 캐비지 롤

두부처럼 으스러진 날, 시뻘건 공격에 맞서기 위한 연대의 맛

내 앞으로 배정된 공문. 문서처리를 누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누를 수가 없었다. 내 업무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의 일, 내가 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절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럴수록 일이 늘어나는 마법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일일이 따지느라 드는 수고와 시간을 생각하면 그냥 내가 뚝딱 해버리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순간의 선택이 앞날을 결정하리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초반에 업무분장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맡기로 했던 일이었다. 섣불리 문서를 처리했다간 앞으로 눈덩이 같은 일이 나를 덮치고 말 것이다.


부장에게 갔다. 내 업무가 아닌 공문이 내게 지정되었다고 말을 했다. 내 업무가 아닌게 맞다고 했다. 그런데 왜 내 앞으로 공문이 배정되었냐고 물었더니 위에서 나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그럼 내 업무라는 거야? 다시 물었더니 역시 내 업무는 아니라고 했다. 영 못 미더워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부장은 그러라고 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환히 웃는 그 얼굴에 차마 말을 더하지 못하고 그저 돌아섰다. 영 찜찜했다. 가장 불쾌했던 건 하나라도 업무를 더 하지 않기 위에 기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연대와 협력. 크고 작은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가치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함께 협력해야 하니까. 진정한 의미의 연대를 위해서는 명확하고 공정한 분업이 필수적이다. 각자가 맡은 조각이 분명해야 그 부분들을 모아 하나의 커다란 전체를 구성해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조직은 삐그덕 대는 게 너무도 당연했다. 업무 자체가 제대로 나누어진 꼴을 본 적이 없으니까. 소수의 희생만으로 굴러가는 조직. 지쳐버린 사람들이 떠나면 또 다른 뜨내기들의 피눈물로 메워지는 조각의 틈.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거라곤 소리 없는 아우성, 가시 빠진 악다구니였다. 무표정한 표정을 하고 온 몸으로 내뿜었다.

'나, 니들 몫까지 겁나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짜고 맵고 쓰기만 한 직장에서 달큰 새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언제나 옳은 올리브유와 마늘의 조합 베이스에 달달한 맛을 내는 양파를 달달달 볶고, 토마토를 뭉근하게 끓여서 토마토소스를 만들었다. 아직 덜 여문 토마토로 만들어진 소스는 시큼한 맛이 제법 강했다. 톡 쏘는 맛을 달래기 위해 올리고당을 넣었다. 시큼함이 눌러져 새콤함으로 내려왔고, 거기에 매운 고추를 첨가해 알록달록한 맛이 완성되었다. 나노 크기로 썰어둔 당근과 으깬 두부를 섞어 살짝 쪄낸 양배추 안에 넣고 돌돌 말았다. 여러 개의 양배추 롤 위에 자박하게 소스를 붓고 함께 지글지글 졸였다.


어느 때보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따뜻하게 데운 양배추 롤을 개시했다. 부드러운 양배추를 씹으면 더 부드러운 두부가 입안에 들어왔다. 부드럽다고 밋밋하기만 하다 생각하면 오산! 심심한 두 재료가 소스와 만나 다채로운 맛을 냈다. 역시 아름다운 맛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협동이다. 자신의 몫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 그게 핵심이다. 어느 하나라도 과하게 비중을 높이면 그건 그 재료의 맛이지 요리라고 할 수 없다.


그날의 도시락은 적당히 밸러스를 맞추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덕에 아주 흡족한 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묵직하게 베이스를 맡은 두부와 양배추에 다채로운 멜로디의 변주를 얹은 맛. 울적한 마음에 활기가 울려 퍼졌다. 마음이 두부처럼 으깨지는 날, 맵고 쓰고 시고 짠 시뻘건 공격들이 날 향해 폭격해오는 그런 날이면 다시 떠오를 맛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휘뚜루마뚜루, 떠먹는 고구마 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