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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May 03. 2022

단호박의 변신은 무죄, 단호박 요리

삭막한 일터에 달콤함 더하기

간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단 것, 짭짤한 것, 단짠의 조화, 그 어떤 것에도 크게 열망하진 않았다. 하지만 입맛도, 취향도 변한다. 간식과 식사의 총량이 비슷해졌다. 대부분의 간식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직장에서 남이 주는 간식.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불쑥’ 건네는 간식. 그건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마음이니까. 삭막한 공간을 뚜벅뚜벅 걸어갈 용기의 원천이고, 갈 곳 잃고 방황하는 마음을 잡아주는 닻이니까. 


A가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같은 교무실이 아니라 서로의 출근 여부조차 잘 모르는 사이. 가끔 서로를 스칠 때마다 나를 둘러싼 어두운 피로감을 알아보고 달달함을 투척하고 가는 A였다. 투명한 비닐봉지로 싸인 선명한 달걀노른자와 저녁 가로등 빛의 중간쯤의, 주홍빛에 가까운 진노랑 빛이 보였다. 단호박이었다. 아니, 밤호박이었다. 짙은 녹빛의 껍질마저 보드랍게 씹히는 맛이 구수하고 달콤했다. 이거다. 이건 무조건 사야 해. 


나는 밤호박 한 박스를 주문했다. 처음엔 A가 건넸던 간식처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시럽을 뿌린 것처럼 달았다. 인공 단맛이 주는 순간의 자극이 아닌 은은하고 감미로운 위안의 맛이었다. 하지만 갈대 같은 나는 안정적인 맛이 살짝 지루해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돌아선 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을 뿐. 그렇게 시작했다. 작은 변주가.


먼저 시도한 것은 단호박 에그 슬럿이었다. 간단한 조리법에 비해 근사한 한 끼가 완성된다. 살짝 익힌 단호박의 속을 파내고 대신 달걀과 치즈로 채웠다. 기분에 따라 소금과 후추를 넣기도 하고, 그날의 냉장고 사정에 따라 파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 돌리면 완성! 소박한 단호박이 그럴듯한 요리가 되었다. 투박한 초록색 겉옷 위에 하얀 치즈 스카프가 휘날렸다. 조심스레 한 입 잘라 입에 넣었다. 전자레인지의 열에도 여전히 수분감을 머금은 단호박의 포슬함과 치즈의 쫀득함, 익은 달걀의 묵직함이 입에서 조화롭게 굴러다녔다. 뜨겁다고 호들갑을 떨며 호호 불어 먹었지만, 온기를 가진 달콤함은 온기 없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로가 되었다. 


단호박 에그 슬럿은 여전히 맛있었고, 일터는 여전히 밥맛이었다. 그때쯤이었다. ‘충성심 경쟁’이란 말을 들은 건. 그 다섯 글자를 풀이하자면, 관리자가 교과 주임들이 모인 자리에서 'TO가 있으나 어느 교과에 줄지는 모른다. 그러니 열심히 해봐라'라는 말을 전했고, 정교사를 향한 기간제들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개소리를 기간제인 내 앞에서 상냥한 얼굴로 떠드는 너님의 머릿속이 참으로 궁금했다. 그런 말을 했다는 관리자의 머릿속도. 어디 한번 펼쳐보아라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가장 마음에 드는 충견을 고르겠다, 이런 심사인가. 


노동자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조직을 위한 부속품 정도로, 아니 오너를 위한 기계 정도로 보는 그 아니꼬운 생각이 불편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을 위해 불태우는 충성심이라 오역하는 그들만의 뒤틀린 언어가 불쾌했다. '능력을 발휘하는 건 좋은데 네 생각을 너무 말하는 게 문제'라는 식의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부여받은 지위가 노동자라 착각한 외거노비가 된 기분이었다. 노예와 톱니바퀴의 날 사이 어디쯤에 있는 내게 간식을 건네는 동료가 있다는 건 그런 맥락에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건 '동등'한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니까. 나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칼이 들어갈 만큼 익힌 단호박을 적당한 조각으로 자른 뒤 으깼다. 열심히 팔을 휘둘러 만든 달걀 머랭과 분리해 두었던 노른자를 잘 섞었다. 반죽을 그릇에 나누어 담고 전자레인지에 각각 넣고 돌렸다.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단호박 빵을 귀퉁이를 뜯어먹어 보았다. 떡보다는 성기고 시폰 케이크보다는 묵직한 질감이었다. 포근했다. 중간에 씹히는 단호박의 자연스러운 단맛이 입 안을 더 풍성하게 했다. 만족스러웠다. 단호박을 닮아 투박하지만 선명한 노란 마음을 통에 담았다. 내일이면 식을 테지만 괜찮다. 함께 하는 이가 온도를 높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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