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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Apr 29. 2022

비인간적 인간의 고구마 단짝 찾기

직장에서 '착한' 사람과 '인간적인' 사람에 대하여

기쁨이 항상 기쁨인 것은 아니다. 도시락은 잿빛 직장 생활에서 아주 작은 핑크빛 순간을 선사하지만 늘 같은 색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분홍에 가깝지만 때론 짙은 회색빛이 강하게 돌기도 한다. 특히 피로가 몰려드는 수요일부터 그 색은 점점 탁해지는데 목요일이 되면 그 정도가 최고조를 찍는다. 게다가 직장에서 일의 강도가 높아지는 바쁜 시즌이면 도시락은 빛은커녕 그림자에 가까워진다. 그럴 때면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떡, 빵, 고구마, 옥수수 따위의 간단한 먹거리로 도시락 가방을 채운다. 이날의 픽은 고구마였다.


워낙 바쁘기도 했고 냄새도 나지 않은 메뉴라 각자 자리에서 간단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고구마를 꺼내 들었다. 씹는데 힘이 덜 들고 달콤했다. 애정할 수밖에 없는 식단이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부드러운 촉감이 입 안에 펼쳐졌다. 은은한 달콤함이 번져갔다. 재빠르게 뻗어 나오는 직선의 맛이 아니었다. 서서히 휘감아 걸어가는 곡선의 맛이었다. 천천히 찾아온 만큼 오랫동안 머물렀다. 짧은 시간 내에 인간이 제조해낸 결과물이 따라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맛이었다. 한 개를 금세 해치우고 나서 포슬포슬한 식감이 퍽퍽하게 느껴질 때쯤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김치. 


자고로 음식 최고의 궁합은 맵단이라 여기는 내게 고구마의 최고 짝꿍은 칼칼한 김치다. 거기에 톡 쏘는 김치 국물을 호로록 더해주면 고구마가 답답하다는 말은 무색해진다. 떡볶이나 제육같이 매콤하고 약간 끈덕한 양념을 베이스로 한 음식과도 환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곳은 직장, 그것도 바쁜 시즌의 일터, 무얼 바란단 말인가. 직장인에게 점심식사는 더 힘내어 일하기 위한 연료 충전 정도의 시간인걸. 쌉쌀한 아메리카노나  우유에 카누 두 봉지를 넣어 진하게 탄 라떼와 함께할 뿐. 


아쉬운 대로 식사를 즐기고 있는 나의 흥을 깬 건 한 부장의 문자 메시지였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에 대해 묻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 없던 소화력에 문제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메신저로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왜 문자를 보내는 거지? 내 폰에 니 문자 따위 넣고 싶지 않다고!'


그 이후에도 그는 여러 차례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가 전체 공지한 시간과 장소를 임의로 변경했고, 그걸 ‘유연함’이라 표현했다. 그럴 거면 대체 처음부터 지가 하든가! 그딴 유연함으로 일할 거면 애초에 스케줄을 정하지 말고 그때그때 정하든가요. 내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은 건 그뿐이 아니었다. ‘인간적임’을 내세워 내 담당 업무 예산을 자기한테 넘겨달라거나 개인 혹은 부서 간식(우리는 부서별로 돈을 걷어 간식을 구입했다)을 거리낌 없이 가져가기도 했으며, 타인의 업무나 사적 영역에 무신경하게 침범하는 일도 잦았다. 불편한 기색을 비치면 '비인간적'이란 평가를 들어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 당한 것도 열 받아 죽겠는데, 그에 상응하는 분노를 채 드러내지도 못했는데, 그런 말까지 듣고도 참는 나, 정말 '비인간적'인 거 인정! 


기왕이면 착한 사람이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 무심히 뿌린 친절이 누군가를, 세상을 구할 거라 믿었으니까. 직장 생활에 한껏 찌든 뒤엔 종종 생각했다. 착한 사람이라는 건 어떤 사람일까. 확실한 건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선을 잘 지키는 사람. 본인의 영역 안에 주어진 일을 타인에게 미루지 않고 말끔히 처리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을 넘어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착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 상대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주면서 손을 내밀면 그가 바로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마음의 준비가 된 이의 문만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문을 열어둔 사람에게만 다가간다. 그렇게 맺은 사이야말로 ‘인간적’이라 부를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예의와 예민함을 상실한 일방적인 관계에는 ‘인간적’이라는 말 대신 ‘폭력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러니까 부장 너님은 인간적인 게 아니라 폭력적인 거예요. 우리 제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착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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