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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Apr 21. 2022

흔하지만 특별한, 토마토 달걀 볶음

흔해빠져도 대체불가능한 '나'를 꿈꾸며

교직에서 담임은 참 애증의 존재다.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쥐꼬리만한 담임 수당 안 받고 안 하는 게 낫다고들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한 달에 담임 수당을 쥐는 돈보다 반 애들 이것저것 뒤치다꺼리 하면서 드는 돈이며 에너지가 훨씬 더 크니까. 그럼에도 담임을 해야 진짜 선생질 하는 맛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지지고 볶아도 '우리반' 애들 보는 맛이 있으니까. 그 애들에게 하루에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해도 결국엔 상온 이상의 따뜻한 온도에서 멈추는 그 감정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담임 싫은 이유는 참으로 많은데 그 중 하나가 학생부, 일명 생기부 작성이다.


교육부에서 시행하는 대부분의 정책이 그렇듯 뭐 취지는 좋다. 학생들을 지필고사 하나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다양한 발달과정을 교과 담당 교사가, 담임교사가 작성한다니. 매우 이상적이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늘 그렇듯 문제는 현실과의 괴리감이다.


원칙적으로 교과 담당 교사는 모든 아이들의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모든 아이들이 훌륭한 것도, 열심히 수업에 참여한 것도 아닌데, 어쩌라는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교사가 아름다운 눈으로 학생의 작은 긍정적인 측면까지 찾아내야 한다고 치자, 그래도 사람의 일인데 어찌 모든 학생이 모든 교과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휘하겠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 수업 시간마다 매우 성실하게 잠과의 사투를 벌임.’ 혹은 ‘결석이 너무 많아 수업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어 정확한 판단이 불가함.’ 따위의 진실한 글귀는 또 뭐라고 할 것 아니냐고.


담임이 작성해야 하는 항목은 더 많다.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도 뭐라도 채워주느라 공통 문구를 만들어 넣으면, 중복 문구는 삭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어쩌라고. 공란도 안 된다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택 교과제로 인해 혹자는, 자기 반 학생과 수업 시간에 만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럼 겨우 조종례 시간에 보는 것으로 그 학생에 대해 전문성을 발휘해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인데, 아무리 깊은 내공을 가진 전문가라도 신내림을 받지 않는 한 정확성은 떨어지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물론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놈의 생기부 작성 요령은 매년 리뉴얼 되는 것인지. 분명 작년에 아무런 문제 없던 것이 올해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가령, 문구에서 특수문자를 제외하라거나 특정 지역을 나타낼 수 있는 어구를 삭제하는 것들. 예컨대, ‘관악산 환경 정화 캠페인 참여’라는 문구가 들어가면 이 학생이 서울시 관악구 출신이라는 게 드러나니 다 삭제하라는 것이다. 하아. 진짜 이런 좀스러운 업무들이 너무 많은데. 대학 관계자들아, 니들이 애들 뽑는데 왜 우리들이 개고생 해야 하는 거냐. 막말로 수능도 니들이 애들 선발하려고 보는 시험인데 왜 우리가 동원되는 건데. 대입은 제발 니들이 알아서 하고, 우린 진짜 고등학교 수준의 교육 목표 달성 위해서 일 좀 해보면 안 되냐.


물론 안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알고 있다. 그냥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우린 그냥 위에서 굴리는 결정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관리자의 지시에 깨깽. 관리자들은 그 위의 관리자들에게 깨깽. 조직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물론 어릴 땐 그런 꿈을 꾸었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잘났든, 못났든 누구로도 대체 불가능한 ‘나’로. 하지만 이 조직에서 나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을1일 뿐이었다. 그저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을 수행하고 전달하는 조직의 일부이며, 내 자리를 대신할 을2,3,4,5,6....은 언제든 있었다. 조금, 서글퍼졌다. 그때 생각난 건 토마토 달걀 볶음이었다.


중국여행을 갔을 , 여러  끼니를 먹을 때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바로 토마토 달걀 볶음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처음  음식을 봤을  굉장히 신선했다. 당시 내게 익힌 토마토는 소스를 의미했기에, 조리되었음에도 큼지막한 조각을 유지하는 토마토부터 신기했다. 게다가 빵이 아니라 달걀과의 조합이라니. 조리하기도 쉬운데 근사하면서도 독특한  요리가  마음에 들었다.


토마토도, 달걀도 자주 먹는 식재료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요리를 자주 만들었다. 보들보들하고 달걀과 뭉근하게 씹히는 따뜻한 토마토의 촉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둘의 조합은 맛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달걀의 고소함이 밍숭맹숭함 속에 가려질 때쯤 토마토의 앙칼진 오묘함이 터진다. 밋밋하지만 안정감 있는 자와 개성이 톡톡 튀는 이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여행 중에 매번 등장하는  요리를 보고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특별함에서 평범하다 못해 흔해빠진  음식에서  의미를 찾을  없었다. 내가 마치 토마토 달걀 볶음이  기분이었다. 특별한  알았는데 언제 어디서든   있는 흔해 빠진 음식.


“이거 나 중국에 있을 때 진짜 많이 해먹던 음식이야.”


당시 같이 중국 여행을 하던 언니가 말했다. 영양학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훌륭하면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요리. 그래서 서민들의 배를 채우고, 일상을 이어갈 힘을 주는 음식. 워낙 모두가 자주 해먹기에 다양한 변주를 보이는 요리. 그렇다면 꽤 멋지지 않은가. 그래, 복잡하고 어려운 게 훌륭한 건 아니니까. 내 위치가 흔해빠져도, 그저 의미 없는 명령이 스쳐 지나는 일부여도, 그 한 자리가 비면 삐걱대기도 하니까, 내가 가지는 의미는 충분히 가치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존재가 되어 보자고 다짐하며 음식을 삼켰다. 흔하지만 훌륭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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