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의 속사정
<평범예찬>에 실린 글입니다.
오래간만에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가까운 공원으로 봄나들이를 떠났다. 햇살도 적당했고 푸른 풀잎들 사이로 보이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알록달록한 색채들도 마음에 들었다. 꽃의 힘을 빌려서라도 추레한 얼굴에 화사함을 더해보고자 개나리 앞에 가까이 낯짝을 확 들이밀던 내 눈에 개나리 ‘한 송이’가 들어왔다.
개나리 한 송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이 단어의 조합. 개나리는 늘 한 가닥에 다닥다닥 꽃이 박힌 여러 가지가 모여 하나의 군집을 이루니까. 그래서 개나리꽃 한 송이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개나리는 ‘한 송이’에서 비롯되는 가련하고도 처량한 이미지 대신 ‘무리’가 빚어내는 상큼함을 몰고 다니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자고로 개나리 하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는 어린아이 같은, 새로 시작하는 싱그럽고 아기자기한, 뭔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느낌이 연상되었다. 꽃이 가진 다양한 아름다움 중에서도 원숙미나 고풍스러운 기품보다는 철없지만 희망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어여쁨이랄까.
그런데 개나리꽃 한 송이는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너무 얇아서 애처롭게 제멋대로 말린 꽃잎과 여기저기 누렇게 시든 부분은 그 꽃이 견뎌왔을 시련의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의 여리고 아픈 모습을 감추기 위해 늘 그렇게 군중 속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겨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나와, 그 사람과, 우리와 같구나.’
어른이 되면서 배워가는 한 가지는 어른들은 아파도, 슬퍼도 웃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온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을 때 삼켜야 할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갑자기 빵 터뜨리기도 하고, 심지어 아무도 미동하지 않는 순간에도 제일 먼저 눈물을 또르르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던짐으로써 어른답지 못했던 나의 행동을 무마시키는 법을 배웠다. 어른은 또한 하고 싶은 말을 다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며 때론 타인의 속내를 다 알려고 욕심내어서는 안 됨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그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다 토해내야 직성이 풀리고, 가까울수록 진실이라는 말로 포장한 날카로운 말들을 더 많이 뱉어낸다. 때론 상대가 그것을 감당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나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쏟아부어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저 바닥에서 차마 꺼내 올리지 못하고 삐뚤어진 말들 속에서 꼭꼭 숨겨버리기 일쑤다. 그러면서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발버둥 치기도 한다.
내 아픔을 숨기고 누군가의 아픔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이 커질수록 그 거리의 ‘적정선’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너무 가까워 상대를 태우거나 너무 멀어져 상대를 얼어 죽게 만든다. 따뜻한 온기를 전하되 상대와 내게 상처를 주지 않는 거리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나의 상처나 숨겨야 할 진심을 들키지 않고, 상대의 아픔과 외면해야 할 진실을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거리는 어디쯤일까?
정답을 몰라서, 알더라도 지키기에는 너무도 약해서 우린 종종 비겁해진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건 비겁해지는 것일지도. 어쩌면 개나리 역시 자신의 나약함과 초라함을 숨기기 위해 곁에 있는 존재에 붙어 진짜 자기 자신인 ‘한 송이’를 지워버렸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나리의 싱그러움은 성공적인 가면술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옆 사람과 연대하는 개나리의 비겁함은 자꾸 스스로를 숨기며 뒷걸음치는 나의 그것보다 훨씬 멋진 걸. 역시 봄의 전령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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