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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병앓이

바쁜데 한 게 없는 날들

by 정담아

요즘 나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뭘 하느라 바쁜데 뭘 하는지 모르겠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안갯속을 배회하고 있는 기분.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길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걷고 있는 기분. 아, 정말 새로운 세상이야, 신기해하다가, 와 정말 아름답다, 감탄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걷다가, 갑자기 주저앉아버리길 반복하는 상황이랄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유는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긴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었다. 제대로 된 글이 뭔지 몰랐고, 여전히 모르지만 좋은 글, 매력적인 글, 힘이 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픽션을 쓰고 싶었다. 소설과 시나리오.


소설과 시나리오는 그동안 내가 써왔던 에세이와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가장 큰 건 기승전결이 필요하다는 것. 내가 혼자 썼던 첫 시나리오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도 늘 들었던 말은 비슷했다. 밋밋하다, 상업성이 없다 같은 말. 그나마 가장 좋은 표현을 고른다면 담담하다와 담백하다 정도랄까. 어쨌든 심심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했다. 다독, 다작, 다상량. 이 모든 게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내부적 요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부적 요인이었다.


내부적 요인은 바로 나의 성향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생각보다 굉장히 결과중심적 인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과정을 즐긴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방황도 재산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했다. 모두 착각이었다. 나는 결과가 없는 과정은, 성취가 없는 노력은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뚝딱뚝딱 빠르게 나오는 에세이에 비해 소설이나 시나리오는 결과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자료 조사만 하다가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게다가 그렇게 겨우 써 내려간 글도 형편없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결과물이 되지도 못했다. 결국 발전되지 못한 채 끝나버렸으니까. 그럴 때마다 내가 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했다. 분명히 바빴지만, 아무런 결과물을 쥐고 있지 않는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느낌이었다. 가뜩이나 못해서 힘은 잔뜩 드는데, 남는 건 허망함뿐이니 자꾸만 도망치게 되었다.


또 다른 문제, 그러니까 외부적 문제는 바로 돈이었다. 다행히 집에 얹혀사는 덕에 월세는 아끼게 되었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약간의 생활비와 이것저것 사는 데 필요한 비용이 존재했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려(이걸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가끔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걸 먹고, 예쁜 카페에 가는 비용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일을 해야 했다. 글은 나의 꿈이었지, 일은 아니었으니까. 일을 구해야지 싶을 때, 일이 들어왔다. 프리랜서로 할 수 있는 일들. 넙죽넙죽 잘도 받았고, 그때부터 나는 일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일을 그만뒀지만, 글을 쓰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대체 무얼 하고 있나, 싶었다. 단 하나의 위로를 찾자면, 어디 가나 일복 하나는 타고나서 굶어 죽진 않겠구나, 하는 작은 확신이랄까.


올해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불씨를 지핀다. 일명 연말병. 올해 들어 대체 난 뭘 했지?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흘러가네? 망했네? 좀 속이 쓰리네? 짜증나.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우울 모드에 빠지는 병. 절망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잡아주는 건 친구들이었다. 그래도 잘하고 있다고, 네가 하는 그 모든 것들 중 무의미한 건 없다고, 너의 일탈과 무모함을 응원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속상함과 회의감에 쏟아졌던 눈물은 감동의 눈물로 바뀌었다. 사랑스러운 것들. 가끔씩 나를 아프게 하고 내게 상처 주고, 나를 외롭게 했던 내 친구들은 자주 나를 안아주고, 행복하게 하고, 힘이 나게 한다. 아마도 내가 많이 애정하기 때문이겠지. 지금 나를 아프게 하고, 내게 상처 주고, 나를 외롭게 하는 글도 언젠가는 나를 안아주고, 행복하게 하고, 힘이 나게 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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