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사용법
“노래를 하기엔 내 목소리가 그냥 예쁘대.”
예쁘다는 말이 서글픈 건 처음이었다. 예쁨에 ‘그저’가 붙으니 빛이 걷히고 어둠이 앉았다. 선명하게 밝은 무리에서 거무칙칙한 존재로 전락한 그 단어가 턱 걸려버린 내게, 친구는 나머지 문장들을 뱉어냈다.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건드리는 게 가장 중요한데, 마냥 예쁘기만 한 목소리로는 그게 어렵다고. 저 바닥에 들러붙은 슬픔부터 높은 곳을 떠다니는 기쁨까지 전부 표현해야 하는 사람은 그 모든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그 다채로운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내기에 친구의 삶은 너무도 순탄했다고. 그래서 노래를 전공했지만, 노래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친구가 예쁜 건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내 친구는 사주도 예쁘다고 했다. 큰 어려움 없이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받고 사는 운명. 친구처럼 내게도 조금의 예쁨이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멋있는 사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좋게 말해 대기만성 형. 거칠게 말하자면 뭐든 쉽게 얻지 못하는 개고생 팔자. 고개가 끄덕여진다는 사실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나의 지난날은 꽤 아팠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 나지 않을 만큼 슬픔에 가득 찬 날들이었다.
나는 원래 자주 슬픈 아이였다. 슬픔과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아이, 슬픔 속에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아이. 타인의 슬픔에 금방 녹아들고, 제 슬픔에는 늘 허우적대는 아이. 참는 게 익숙한 아이이기도 했다.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문방구에도 가지 않았고, 다들 하나쯤 갖고 있는 브랜드 운동화나 가방 따위엔 아예 시선을 두지 않았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명확한 기준에도 대놓고 밀릴 때도 억울한 눈물을 삼켰다. 집 안의 소란에 귀를 막았고, 알 수 없는 관계의 뒤틀림 속에서 그저 혼잣말을 손끝으로 휘갈겼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잘 견뎌야 한다고, 그래서 꼭 멋지게 꽃 피워야 한다고. 내가 겪은 설움을 모두 터뜨리고 감사를 뿌릴 거라고. 보란 듯이. 그렇게 혼자만의 갚음 의례를 다짐하며 꾹꾹 눌러낸 감정의 응어리를 품고 10대를 지났다. 소용돌이 속에도 하나 선명한 건 있었다. 그 모진 시간 속에도 나는 잘 버티고 있다는 오만 섞인 자신감. 나를 둘러싼 모든 곤궁함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는 자부심. 그게 날 지탱했다. 그렇게 20대가 되었다.
자꾸만 조금 다른 순간을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시절 내 모든 가난함의 시작은 나임을. 그때부터였다. 내가 속수무책으로 녹아내린 건. 관계, 취업, 진로, 돈벌이. 모든 것이 흔들렸고, 그 중심엔 내가 있었다.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에, 제일 앞장서서 나를 벌했다. 빛이 드는 곳, 따뜻한 곳, 넉넉한 곳을 피했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며 이대로 영원히 눈 뜨지 않기를 기도했고, 다음 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차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저 그 비애에 온 몸을 내어주었던 무기력한 날들이었다.
얼마나,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분명한 건 모든 순간이 내 세포 하나하나를 아주 느린 속도로 무의미하게 지났다는 사실이다. 그 시간들을 잡아끌어 훌렁훌렁 빠르게 나를 뛰어넘어가길 바랐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어 그저 널브러져 있었다. 밑바닥을 뚫고 한없이 추락한 곳에서 조각난 감정 찌끄레기들과 뒹굴다 어느 날 문득 손끝에 무언가가 닿음을 느꼈다. 내가 흘린 슬픔의 조각이었다. 시간에 마른 물기가 남긴 짜디짠 파편이 단단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시, 조금씩 곰지락거렸다.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그때의 나를 꺼내는 순간이 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한숨을 토하거나 눈물을 찍어낼 때. 신기하게도 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 속엔 대부분 내가 있었다. 꼭 포개지는 건 아니더라도, 한쪽 귀퉁이가 맞춰지곤 했다. 부모에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에게서도, 무엇을 할지 몰라 애가 타는 청춘에게서도, 자꾸 어긋나기만 하는 관계 속에서 피가 말라 가는 사람에게서도, 파르르 떨고 있던 내가 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마구 내두르던 손발 끝에서 튕겨져 나왔던 그 슬픔의 조각들을, 펑펑 쏟아냈지만 결국 마음에 송글송글 맺혔던 눈물방울들을. 오랜 시간을 지나 단단하게 말라버린 그 파편에 새로운 입김이 닿으면 촉촉해졌다. 그러면 나는 적당하게 메마른 그 조각을 내어 주곤 했다. 그리고는 주문처럼 말했다. 나도 안다고. 그럴 때가 있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 다 지나간다고.
안도감을 쥐어주고 싶었다. 짙은 슬픔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얄팍한 위안을 주고 싶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상대의 슬픔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리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너의 슬픔을 ‘나도 조금은 안다’는 따뜻함을 지피는 데 쓰이길 바랐다.
“나는 멋진 게 부러워.”
예쁜 목소리를 가진 친구가 내게 말했다. 가지런하고 고운 인생도 좋지만 온갖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어내면서도 뽑히지 않는 단단한 생의 멋짐이 부럽다고. 조금은 쓰렸지만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슬픔을 지나오면서 조금은 단단해졌고, 죽을 것처럼 아팠던 감각들에 조금은 무뎌졌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따끔거리는 슬픔의 감각이 반갑다. 그 날카로움이 오랫동안 내 안을 비춰주는 빛이 된다는 걸 아니까. 내 안을 채우는 수많은 슬픔을 고이 간직하고 싶다. 그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반짝이는 위로를 쓰고 싶다. 온기를 담은 작은 부스러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예쁜 꽃을 틔울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