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가 딩크에게 미친 영향
이 글은 앞서 쓴 글 딩크 9년, 마음이 흔들리다 1과 어느 정도 이어지는 심경의 고백이다.
2025년 새해가 밝았다.
2025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햇수로만 따지자면 딩크 10년이 되었다.
만으로 따지면 아직 딩크 9년인 새해의 어느 날, 나는 문득 브런치 역시 내 마음을 흔드는데 크게 일조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된 글, 그 글들이 내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어 처음 연재한 작품 '아직도 미숙한 어른입니다'는 내가 철벽 딩크가 된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구질구질하게, 때론 절박하고 냉소적인 유머로 써 내려간 글들이다.
그 글을 쓰면서 나는 분명 오랜만에 나와 제대로 마주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브런치에 딩크가 되었던 이유와 과정, 나의 마음 상태와 고민들을 써 내려가면서,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했던 것 같다.
그 두려움은 여전히 크고 어둡고 무겁지만, 이제는 그게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동안 막연하던 두려움에 명확한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오랜 딩크였던 내가 마음이 흔들리자 주위에서 한결같이 해주었던 말들.
"아이가 주는 절대적인 사랑은 아이가 없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거야."
"아이가 주는 행복은 상상 이상이야. 내 삶의 기쁨이고, 아이는 내 인생의 보물이야."
"낳아보면 네가 바뀌어. 네가 변한다고. 그리고 네 삶도 변할 거야."
나도 알고 있다.
아이가 주는 행복에 대해서.
실제 부모가 되어 느끼는 만큼은 아니겠지만.
이전까지의 나는 그 말들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도 한결같이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건 부모가 행복한 거잖아.
내가 '아직도 미숙한 어른입니다'에서 줄기차게 썼던 것처럼, 나는 자녀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가 되어 행복하단 말을 탓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아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는 말이 그 아이 역시 부모만큼 너무 행복하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보람과 행복을 느껴도, 아이는 그게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아이는 과연 부모가 느꼈던 만큼 행복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삶이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행복이란 게 희미하게 느껴지는 삶을 살 수도 있을 텐데.
내 아이는 내가 부모여도 행복할까.
아이는 내가 주는 사랑으로 행복해 질까.
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로, 과연 변할 수는 있는 걸까.
나는 순수한 한 영혼을 이 세상에 불러온 모든 책임을 훌륭하게 책임지면서도,
아이를 행복하게 하고,
또 아이를 세상에 올바르게 내보낼 수 있을까.
부모가 되는 내 행복만을 바라보고 결정할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브런치에 이런저런 글을 쓰며 나는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점점 더 자주, 그리고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무심히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그 글을 다듬으며 내 마음 역시 다듬어지고 있다.
애초에 내가 제주에서 마음이 흔들렸던 것의 단초는 브런치에 쓴 첫 글이 그 시작점인 것 같다.
나아가고 싶은 무의식이 글로 터져 나온 순간.
글쓰기의 정화 작용일 것이다.
스스로 나아갈 길을 더듬어 보는 행위.
두려움의 형체가 정확하게 보이니,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브런치라는 거대한 공간에 내 글을 여과 없이 남기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브런치에 이러한 글들을 남기며 나는 한 가지 마음이 우뚝 솟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겁먹은 의문과 고민과 내면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보기로.
만일 내게 한 영혼을 돌봐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면 뼈를 깎고 나를 갈아넣는다는 각오로 그 책임을 다 할것을 맹세한다.
제대로 책임질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할 때가 온 것 같다.
언제까지나 미숙한 어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삶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가보려 한다.
임신출산에 성공하면, 나는 한 생명을 위해 온 책임을 다 할 것이고.
실패한다 해도, 내가 두려움을 딛고 용기를 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