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 되어 명랑한 발걸음으로 출근길을 걸었다. 회사에 도착해 탕비실에서 마주한 동기들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모두들 열성껏 준비하는 모습을 봤기에 괜스레 미안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고 난 후 회사 내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모여있는 동기들 쪽으로 다가갔다.
"점심 먹으니까 졸리길래 카페 간 김에 사 왔어요. 다들 커피 좀 드세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건넸다. 그러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와 같은 커피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라고 예상된, 그렇지만 예상보다 긴 말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감사해요. 이제 거의 정직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셔서 그런가? 통이 크시네요."
"예? 아니..."
"그러게요. 이거 마시면 나중에 동기들끼리 서로 평가할 때도 풀잎 씨 점수는 잘 드려야겠다. 맛있게 잘 마실게요."
동기 두 명의 말이 끝나고 그제야 다른 남자 동기도 웃음을 보였다. 내 대답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다른 이의 말에 덮여선, 아무도 귀담아 주지 않아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모두가 웃고 있는 가운데 난 놀라서 뇌가 멈춘 듯 잠시 경직되어 있었다. 누가 들어도 아픈, 가시가 돋쳐 있는 말들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며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인턴으로 지내다가 평가에 따라 정직원으로 전환되는 회사가 있다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인턴을 했던 모두가 후에 정직원 입사 시험을 볼 때 똑같이 가산점이 적용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설마 이번 발표에서 딱 한 번 좋은 평가를 들었다고 상사들에게 좋게 인식돼, 나중에 입사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럴 리 없었으며 그렇다 한들, 이런 반응은 당황스러워 동기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년을 함께 지내며 서로 북돋아 주던 동기들이 맞나, 분명 같은 얼굴인데 눈빛과 웃음에는 싸늘함이 담겨 있어 낯설게만 느껴졌다. 불편한 경계심이 공기 중에 가득 차 나까지 붙죄는 듯해 숨이 답답했다.
그날 이후로 행복에 겨웠던 나의 회사 생활은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기들은 이전과는 다른, 묘하게 쌀쌀맞은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게 느껴져 함께 있으면 편하지 않았고 숨이 턱턱 막혀 갑갑했다. 집에 녹초가 되어 돌아와도 왠지 모를 괴로움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러모로 늘 피곤해서 점심시간에 차라리 낮잠을 자는 게 편했다.
여느 때와 같은 즐거운 금요일이 될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회식이 있던 언짢은 어느 날이었다. 일렬로 붙인 긴 상에 다 같이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들 먹느라 여념이 없어 생긴 소중한 정적을 깨고 동기 한 명이 목소리를 내었다.
"점심시간 아니면 회사에서 서로 잘 보기도 힘드니까 그 시간만큼은 항상 인턴 동기들끼리 모여서 얘기하곤 했는데, 요즘 들어 풀잎 씨는 저희랑은 안 놀아주고 낮잠만 자느라 회사에서 도통 볼 수가 없다니까요. 피곤해 보여서 깨울 수도 없어요."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내 얘기로 막간의 정적을 굳이 채웠다. 동기들은 히죽거리며 웃었고, 다른 이들은 그냥 분위기에 따라 허허 웃는 듯했다. 느닷없이 안줏거리 삼아 내 이야기를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생각하는 와중에, 한 마디 덧붙이는 우리 부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할 때 조는 것도 아닌데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졸리면 점심시간 때만이라도 푹 자고 일어나야 능률이 오르니까."
너그럽게 감싸는 타인의 말에 잠시 불편했던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편해졌고. 다들 있는 자리에서 나를 무안주고 깎아내리려 했을, 웃고 있던 타인의 표정은 상황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듯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오전, 화장실 칸 안에 있는데 동기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내 이름이 언급되었다.
"아니, 근데 풀잎 씨는 평소에 얼마나 여우짓을 떨길래 그 부서 팀장이 편을 들어? 난 그냥 웃으려고 말한, 별것도 아닌 얘기에 굳이 분위기 싸해지게 정색하고 말할 건 뭐야? 내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참나."
"그러게. 풀잎 씨가 뭔가 알랑방귀를 뀌었겠지. 아무것도 안 하는데 괜히 잘해주겠어? 매번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순진무구한 표정 짓는 것도 짜증 나."
깔깔 웃으며 험담을 마친 동기들이 화장실 밖을 나가는 소리가 났는데도, 난 한동안 경직되어 칸 안에서 나갈 수 없었다.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악의가 담긴 터무니없는 말들에, 그들의 입에서 나온 험담이 실제 뇌에서 그렇게 생각이 들어 출력된 건지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여우짓을 떤 적도, 척을 한 적도 없으며 그런 표정을 지은 적도 단연코 없었다. 어찌하면 저런 왜곡된 시각으로 타인들을 바라보는 것일까. 타인을 폄하하면 스스로가 지닌 결핍이 채워질 것만 같아, 실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를 일리 있는 추측인 양 둔갑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칸에서 나와 찬물로 손을 씻으며 상기되어 뜨거워진 양볼과 마음을 식혔다.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난 늘 해왔던 것처럼 남은 회사 생활에만 집중하자. 내가 아닌데, 뭐. 떳떳하면 된 거지. 휘둘릴 거 없어.'
화도 눈물도 아까워 거울을 보면서 단단해지도록 마음을 토닥토닥 다졌다.
그 뒤로도 동기들의 유치하고 노골적인 시기, 질투는 계속되었다. 탕비실에서 홀로 앉아 쉬고 있는데 다른 남자 사원이 차를 마시러 들어와 예의상 나에게 한두 마디를 건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하이에나처럼 나타나 다 들리게끔 경악스러운 말을 던졌다.
"나도 남자랑만 어울리면서 차 마셔야지."
그러곤 관심을 요하는 어린아이처럼 내 반응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행동과 태도가 누적될수록 위축되기는커녕 그들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대신 정 없을까 봐 시선을 한 번 보내곤 무시했다. 심리적으로 동요되지 않는 내 모습을 보곤 일그러지는 표정이 돌아오곤 했다.
살면서 무리 속에서 표출되는 시기, 질투의 감정들을 수없이 봐왔지만 취업이란 목표가 이렇게까지 만든 것인지. 비난, 분노, 미움 등의 모습으로 변질되고 또 몸집이 커져 결국은 괴물처럼 변해버리는 듯해 씁쓸했다. 서로 응원하던 동기들의 한없이 맑았던 표정은 다 허상이었을까, 진짜 속마음은 감춘 채 살아가는 껍데기에 속은 것일까.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의 비열한 면을 마주한 것 같아 오히려 내 낯이 뜨겁고 부끄러웠다. 그저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잔했고 한편으로는 슬프기까지 했다.
어느덧 인턴 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무렵. 앞장서서 노골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냈던 동기가, 초반에 마주했던 맑고 선한 얼굴을 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을 하곤, 다른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합격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한 시점부터였다. 동기들에게 한턱을 쏘겠다고 집에 간다는 내 팔짱을 끼며 조르는 그녀의 모습에 소름이 끼쳐서 속으로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뻔뻔함에 기가 막혔고, 취업이라는 기쁨에 취해 그동안 행했던 자신의 행동을 망각해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확실히 깨닫게 된 점 하나는, 누군가의 두 얼굴을 마주한다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며 거북한 느낌까지 든다는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 뒤면 인턴 신분도 끝이었다. 서운함과 후련함이 동시에 들었다. 내 사수는 나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열심히 잘 해줘서 고마웠다고, 풀잎 씨는 어딜 가나 잘 해낼 거라는 좋은 덕담만 해주었다. 실담이라는 게 느껴져 콧날은 시큰했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배울 점 많았던 어른이자 사수가 있어서 그나마 보람된 인턴 생활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상사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당차게 밝은 태도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은 좋지만, 누군가에게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며 웃으며 등에 칼을 꽂는 이들이 분명 있으니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마음 깊이 와닿지는 않았지만, 불과 몇 달 후 조언의 듯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