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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3. 비즈 반지

소설


라면을 먹고 나니 배가 불러 남아있던 긴장도 풀리며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짐과 생각은 내일 마저 정리하기로 하고, 설거지와 목욕을 후딱 끝내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피곤함이 가득했던 이곳에서의 첫 번째 밤이자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의 아침이 왔다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잠이 덜 깼는지 무심코 누워서 바라본 천장이 낯설게 느껴져서 순간 여기가 어디지 하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곤 아, 하고 깨달으며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밥을 간단히 먹고 어제 못다 한, 짐 정리와 청소를 이어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진 웬만하면 거의 누워있었는데 지금은 의욕이 불끈불끈 솟아나 몸을 자꾸만 움직이고 싶었다. 작업실과 시골집을 갖고 싶었던 꿈을 이루니 행복해서 신이 절로 났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시 또 봐도 마음에 들어 뿌듯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해 오늘은 이 정도만 하기로 하고 송골송골 맺힌 땀을 찬물로 씻어내리고는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아 가스불에 올렸다. 물이 끓는 동안 보리 티백을 준비해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물 끓는 소리에 보리 티백을 넣고 조금 우러나오기 시작하면 불을 끈다. 티백을 건져낸 후 주전자 뚜껑을 덮었다. 그리곤 가방 안에서 비즈가 담긴 통을 꺼냈다. 취미로 하려고 전에 사놓고는 방치해놨었는데 이곳에서 틈틈이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챙겨왔다.

보리차가 식는 동안, 어제 만난 할머니들에게 어울리는 비즈 반지를 만들기로 했다. 방법을 보면서 만드는 거라 엉성할 수 있지만, 아까 물을 끓이며 생각해 보니 어제 정자에서 담소를 나누던 할머니들 모습이 아름다워 왠지 그냥 선물을 하고 싶었다. 별 건 아니지만 별처럼 빛나는 선물이 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우선 비즈 반지 세 개를 정성스럽게 만들고 나서, 아직 만나지 못한 다른 마을 주민들을 위해 알록달록한 반지를 여분으로 더 만들었다. 완성된 반지들을 통에 담아놓고, 만드는 사이 식은 보리차를 병에 쪼르르 옮겨 담아 냉장고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나갈 준비를 끝내고 집 밖으로 나왔다. 문을 잠그면서 세월에 바랜 간판을 잠시 올려다보곤 길을 나섰다. 오늘도 길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당시에는 저녁시간이라 다들 식사를 하거나 시골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람이 없는걸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었다. 그저 작업실 겸 조용히 살 곳을 찾는다는 내 말에, 주민 수가 적어 한적한 곳이라 지내기 좋을 거라는 부동산 사장의 설명이 아주 흡족할 뿐이었다. 이 마을이 좋았고 슈퍼였던 이 공간도 마음에 쏙 들어서 거의 바로 계약한 것이다.

어제처럼 할머니들이 모여있길 바라며 정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비즈 반지가 담긴 통을 손에 꼭 쥔 채 가는데, 불어오는 5월의 기분 좋은 바람이 시원한데도 약간은 긴장이 되는지 이마에는 구슬땀이 살짝 맺혔다. 어느덧 시야에 들어온 정자에는 다행히도 할머니들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자 근처에 다다르면서 대화에 끼어들 기회를 조심스레 엿보다가 무작정 비즈 반지 통을 들이밀며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거 제가 만든 비즈 반지인데요. 실력이 좋지 않아서... 별 건 아니지만 드리고 싶어서 좀 전에 만들어 갖고 왔어요.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받지 않으셔도 정말 괜찮습니다!"

사실 선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해 쭈뼛거리면서 설명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할머니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쏠렸다. 비즈 반지가 담긴 통을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눈망울에, 밤이라 곤히 자고 있던 별들이 깨어나 빛을 내는 것처럼. 그리곤 열심히 반지를 구경하다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정말요? 이거 우리 주는 거예요?"


"어머나, 너무 예쁘다!"


"아유, 젊은 분이 솜씨가 좋네. 이렇게 예쁜 걸 우리가 그냥 받아도 되나... ."

예상치 못한 칭찬이 한아름 담긴 말풍선 세 개의 반응에, 좋으면서도 조금은 멋쩍었다. 아마도 손주처럼 생각해서 내가 민망할까 봐 더 좋게 반응해 주는 게 아닐까 해 마음이 따끈따끈 해졌다. 그 덕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대답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재료도 아주아주 저렴한 거고... 그런데 이게 쉽게 잘 끊어져서요. 끊어지면 또다시 만들어드릴게요. 만드는 게 간단하고 쉽거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할머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게 물었다.

"만드는 방법이 쉬워요? 우리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가요?"

할머니의 말 한마디에 정자에서는 갑자기 비즈 교실이 열렸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할머니들은 눈을 찡그리며 비즈를 한 알 한 알 신중히 골라 각자 마음에 드는 팔찌를 만들어 나갔다. 줄에 비즈 한 알 끼울 때마다 꺄르르 웃음소리가 곁들여져 나도 저절로 웃음이 전염됐다. 완성되어가는 팔찌를 신기해하며 골똘히 집중한 할머니들 모습에 뿌듯했다. 심심할 때 만들려고 챙겨 온 비즈가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머니들은 스스로 만든 팔찌와 내가 선물한 반지를 모두 끼고는 하늘의 구름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구경하고 또 구경했다. 천진난만한 모습에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다. 그러다 비즈 교실을 열게 한 할머니가 아닌 또 다른 할머니가 물었다.

"예전 슈퍼 집에서 산다고 했나요? 혹시 얼마나 있을 건지 물어봐도 돼요?"


"네, 슈퍼였던 곳이요. 제가 이곳에서 쉬면서 하고 싶은 일 하려고 작업실 겸 집을 구한 거예요. 여기서 오래 살고 싶어서 아예 매매했고요. 만약에 언젠가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다 해도, 작업실이기도 하니까 또 주기적으로 와서 지낼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할머니들은 무언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상했던 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사실 묻지 않아서 좋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당연하게도 수없이 듣는 질문이지만, 처음 만난 사이이거나 오랜만에 본 사이인데 선을 넘으며 꼬치꼬치 막 캐묻는 건 항상 불편하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게 민감할 수 있는 질문들을 아무렇지 않게 묻고, 들은 대답을 토대로 자기 멋대로 판단하거나 쉽게 알게 된 정보라서 그런지 남에게 쉽게 말을 전한다.

다만 내 느낌이지만 할머니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듯했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게 어르신들께 혹시 방해가 될까요? 한적한 곳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서 왔거든요."

쏟아지는 질문은 없어서 좋았지만 나도 모르게 솔솔 말하게 되었다. 나답지는 않은 모습이라 속으론 좀 웃음이 났다. 그러자 할머니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곤 그저 가만히 웃더니 말했다.

"방해라니, 말도 안 돼요. 그게 아니라... 실은 우리가 겁이 나서 그래요."


"네? 겁... 이요?"

"사실 이 마을에 살러 왔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지독하게 무료한 늙은이들 삶에 그저 새로운 사람들이 온 것만으로도 참 좋았지요. 그런데 고요한 시골에 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서 다들 몇 개월도 못 버티고 도로 이 마을을 떠나갔어요. 나중에 꼭 놀러 오겠다는 말을 했지만 그 누구도 이 마을에 다시 얼굴을 비춘 이는 없었지요."


"아... 그랬군요."

쓸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말에 다른 할머니가 덧붙여 말하며 동조했다.

"우리요, 정을 주는 건 참 쉬운데 정을 떼는 방법은 잘 모르겠어요. 이 나이를 먹고도 정든 사람과 이별하는 게 힘들어요. 이건 어째 세월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 땐 너무나도 좋다가, 다시 가버리고 나면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한동안은 울적하고 어수선해요. 적막함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그런지도 몰랐을 땐 알지 못했는데, 갈수록 사람이 귀해지니 떠난 후에는 훨씬 더 쓸쓸하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게 덜컥 겁이 나는 거지요. 헤어지는 게 무섭고 슬프니까요."

"서운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관심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또 정이 무섭게 드니까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예요, 우리가."

할머니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고 또 먹먹했다.

"어제 우리가 너무 매몰찼죠? 그렇게 보내고 사실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괜히 그냥 보냈나 싶기도 하고... 서운했다면 우리가 미안해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서툴러서 그래요."

예상대로 역시 텃세는 아니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무서워서 마음을 닫은 것이라는 설명에 어쩐지 공감이 되었고 그런 할머니들이 가여워 울컥거리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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