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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1. 새 보금자리

소설


새 보금자리가 된 이곳은 사실 마을에서 이전까지 슈퍼의 모습으로 오래 자리 잡고 있었다고, 부동산 사장은 설명했다. 슈퍼를 운영하던 어르신이 일 년 전 도시로 떠나면서 비어있게 된 이곳에 내가 운 좋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건물 외벽 세월이 기록된 간판 아래 유리문을 열면 진열장이 있었을 슈퍼였던 공간이 있고, 들어가 안쪽으로 또 있는 문을 열면 가겟방의 공간이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있다. 가겟방은 본래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이지만, 어르신이 이곳에 살면서 슈퍼 운영을 해온 덕에 방이 그다지 작지 않았고 싱크대와 화장실도 있었다. 사는 데 지장이 전혀 없는, 갖출 거 다 갖춘 주거용 건물이라 나에겐 딱 안성맞춤이었다.

겉은 허름해 보일지라도 내부는 세월이 내려준 먼지만 있을 뿐 허름하지 않았다. 공간이 다치지 않도록 소중히 다뤘던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졌다. 구수함과 다정함이 잔뜩 묻어있는 이곳을 나의 첫 작업실이자 살 집으로 선택했다. 이제부터 가게의 유리문은 내 집의 현관문으로, 슈퍼였던 공간은 나의 작업실로, 어르신이 살던 가겟방은 내가 지낼 방으로 쓰일 것이다.

배낭과 여행 가방은 집 밖에 그대로 두고 우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에 재능은 없어서 차차 수시로 해나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설렁설렁 대충 했다. 물론 오늘 당장 자야 할 방 안만큼은 집중적으로 깨끗이 쓸고 닦았다. 내 마음에 들 정도로만 청소를 마치고 여행 가방 바퀴에 묻은 먼지를 닦은 후 배낭과 함께 방 안에 들여놓았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뒤덮인 상태라 모든 걸 제쳐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목욕부터 했다. 씻고 나오니 고단함도 같이 물에 씻겨 내려갔는지 기분이 한껏 상쾌해졌다.

짐을 대충 풀고는 마을 구경을 할 겸 길을 나서기로 했다. 조그마한 마을이라 주민 수가 적다는 얘기를 부동산 사장에게 들었지만 아직까지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해 의아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어찌 됐든 이 마을에서 지내기로 한 이상 인사를 먼저 하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벅찬 설렘이 서랍 속 숨어있던 용기를 끄집어낸 듯했다.

좁은 길을 따라 빙 돌아가다 보니 저 멀리 정자가 보였다. 정자에는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세 명의 할머니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있는지 깔깔깔 호호호 하하하,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자 뒤편으로는 숲이 보이고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새들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어쩌면 당연한 풍경일 수 있지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그런 풍경과 어우러진 할머니들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아름다워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서인지 반짝반짝 빛이 나기까지 했다.

나이와 가족관계부터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 결혼은 했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등 폭포수처럼 쏟아질 질문 폭탄에 대비해 서울에서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터라 심호흡만 한 번 크게 하곤 정자 가까이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갔다. 정자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가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저...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저쪽 슈퍼였던 건물에서 살게 된 풀잎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할머니들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답고 따듯한 분위기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으나 어떤 답변과 반응이 돌아올지 몰라, 할머니들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한없이 길게 느껴졌던 몇 초가 흘러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어서 와요."


"그래요, 잘 왔어요."

할머니들은 한 마디씩 환영의 인사를 내게 건네곤 그저 말없이 미소만 띠고 있었다. 예상했던 질문 폭탄은 없어 다행이면서도 더 이상의 아무런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매우 당황한 나머지, 난 잠시 얼음이 되었다가 바람이 땡을 친 것처럼 뒷걸음질 치며 걷다 꾸벅 인사하며 외쳤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는 후다닥 내 보금자리로 달려갔다. 현관문을 열고서 터덜터덜 방 안으로 들어가선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은 서서히 풀리는 듯했지만 걱정은 자꾸만 부풀었다. 설마 말로만 듣던 시골의 텃세일까? 하지만 그동안 무리에서 느껴왔던 텃세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텃세는 눈빛만으로도 느껴진다. 떨떠름해하며 교묘하게 기분 나쁜 그런 느낌. 반면 아까 할머니들의 눈빛은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따스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할머니들도 나처럼 낯을 가리는 성격이거나, 과도한 관심은 오히려 내가 불편할 수 있으니 베푼 배려였거나. 할머니들에겐 내가 낯선 사람이기도 해서 충분히 경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풀었던 걱정이 금세 줄어들었다.

마음을 다독이는 사이 날은 저물었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는 내일 마저 인사하기로 했다. 앞으로 살면서 천천히 알아가면 되니까 급할 건 없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한 보금자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오늘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아 그저 뿌듯했다.

꼬르륵하고 배꼽시계가 울렸다. 음식을 할 수 있는 기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짐을 대충 풀어 가져온 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라면을 끓이다 면이 좀 덜 익었을 때 가스불을 끄고 바닥에 꺼내놓았던 냄비 받침 위로 라면을 냄비째 가져다 놓은 후 숟가락, 젓가락만 챙겨 서둘러 앉았다. 얼른 라면 한 젓가락을 집어 호로록 먹으니 오늘 하루의 힘듦이 몽땅 사라질 정도로 꿀맛이었다.

그러다 문득 낮에 설치된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보리차가 떠올라 꺼내왔다. 헹궈놓았던 앞접시도 가져와 라면을 몇 젓가락 덜고는 그 위에 차가워진 보리차를 조금 부었다. 그리곤 면을 보리차에 살짝 담갔다가 곧바로 호록 또 한두 젓가락을 연이어 먹었다. 이렇게 먹으면 면이 탱글탱글하면서도 보리차의 구수한 맛이 함께 느껴져 감칠맛이 난다.

누군가는 괴상한 식사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이런 방식으로 라면을 먹게 된 건, 내가 새 보금자리로 이 마을을 선택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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