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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6. 달래 간장과 콩나물밥

소설


마을에서의 셋째 날 아침. 오랜만에 달곰한 잠을 잔듯했다. 서울에 있을 땐 이미 밤은 내려 새벽마저 쫓아오는데 궁싯대고 있자면 초조한 마음이 들어 못마땅했었는데. 이곳에서는 한잠 푹 자고 깨어나 누운 채로 꼼지락대고 있으니 보송한 느낌의 아침이 좋아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비즈 반지를 만들며 얘기 나누었던 어제를 곰곰이 떠올렸다. 할머니들 이름을 알게 된 금쪽같은 날이었다. 묶음 머리를 한 77세의 복자 할머니, 파마머리를 한 74세의 희옥 할머니, 단발머리를 한 73세의 기정 할머니, 그리고 30세 나 풀잎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할머니들에겐 나를 편하게 대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러다 궁금했던 질문을 조심스레 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마을 주민분들은 어디 계세요? 여기 온 이후로 뵌 적이 없어서요."

희옥 할머니가 눈길은 경치에 고정한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싱긋 웃으며 대답을 했다.

"애초에 조그만 마을이라 많이들 살지는 않았는데 시골에서 도시나 딴 곳으로 점점 떠나가다 보니 다른 마을 사람들은 없고, 여기 영감들은 여행 갔고. 이렇게 남은 우리끼리 오순도순 살고 있지."


"그렇군요."

할머니들에, 마을에 한 걸음 더 다가선 마음이 들은 어제였다.

천장을 응시하며 빙그레한 미소를 띤 채로 몇 분을 더 누워있다 이부자리를 개었다. 대충 씻고는 여전히 정리가 덜 된 작업실과 방을 치우고 있는데, 갑작스레 현관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유리문밖으로 할머니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딘가 비장해 보이는 표정을 한 할머니들 손에는 고무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복자 할머니는 불투명한 원형 통도 들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가 얼른 문을 열고 인사하며 물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청소 좀 도와주고 싶어서 왔어. 오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비어있던 곳이라서 청소할 게 많을 것 같아서. 어제 반지랑 팔찌도 고맙고 심심하기도 해서... ."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희옥 할머니의 설명에, 나는 놀라서 급하게 이야기했다.

"네? 아니에요! 차츰차츰 청소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 쉬엄쉬엄하면 돼서요. 힘드신데 진짜 진짜 괜찮아요. 제 집인걸요, 정말로 저 혼자 할게요! 아침은 드셨어요?"

"에이, 온 김에 구경도 할 겸 살짝만 해주고 갈게.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가만히 안 움직이고 있으면 몸이 찌뿌둥해서, 운동 삼아 금방 하지 뭐!"


"그래, 다 함께 빨리 하고 풀잎이도 같이 마을회관 가서 밥 먹자고!"

기정 할머니와 복자 할머니는 대답과 동시에 말릴 틈도 없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가져온 통 안에는 걸레와 먼지떨이 등 각종 청소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할머니들의 알뜰한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생각도 잠시, 마스크라도 어서 할머니들에게 건네곤 나만 가만히 있을 순 없기에 이에 질세라 하던 청소를 마저 부지런히 해나갔다.

할머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뿔뿔이 흩어져 구석구석을 말없이 쓸고 닦으며 광이 날 정도로 청소를 했다. 변변치 않은 비즈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엔 그녀들의 반짝이는 구슬땀이 너무나도 과분해서 미안함에 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보답해야겠다고 마음에 꼼꼼히 적었다.

청소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그렇게 청소 도구가 담긴 통을 든 나와, 우린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할머니들은 평소에 하루 중 최소 한 끼는 마을회관에 모여 같이 먹는다고 했다. 혼자 먹으면 적적하기도 하고 귀찮아서 대충 먹게 되거나 끼니를 아예 거르게 돼서, 각자 반찬 하나씩만 가져와도 진수성찬이 되고 무엇보다도 함께 먹으면 식사가 즐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을회관은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기대됐다. 도착해서 마주한 공간엔 부엌과 자그마한 냉장고, 식탁, 밥솥 등, 그리고 웬만한 요리 도구와 기본적인 양념 재료들이 있었다. 아담해서 다정한, 할머니들의 아기자기한 생활이 느껴지는 기대 이상의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들은 신발을 벗자마자 또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 내 할 일을 찾기 위해 서성이니 자꾸만 그냥 앉아 있으라며 만류했다.

"아니 청소도 다해주셨는데요... 제가 해드려야 하는데... 죄송스럽네요. 다음엔 제가 맛있는 거 꼭 해드릴게요!"


"아가가 무슨 음식이야. 아주 간단히 먹을 거라 밥 한 공기만 더 놓는 거야.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정 그러면 숟가락, 젓가락만 좀 놔줄래?"

30살인 아가라니, 민망했지만 뭉클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잘가닥거리며 수저와 컵들을 챙기고 뒤를 돌아보니 식탁에는 벌써 눈부신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할머니들도 어느샌가 의자에 앉아 미소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정 할머니가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나를 향해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고등학교 점심시간, 수저가 담긴 통만 챙겨 교실 문 앞에서 기다려주던 친구들에게 가듯 종종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와, 어떻게 이렇게 손이 빠르세요? 저도 요리 좋아해서 하긴 하는데 굉장히 느리거든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뚝딱뚝딱, 식탁 위를 금세 음식으로 채우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마치 마법을 부리는 듯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아까 우리가 청소하러 가기 전에 복자 언니가 미리 와서, 준비한 콩나물밥을 밥솥에 담아놨더라고. 그래서 더 빨리 됐지요."

기정 할머니는 복자 할머니의 팔을 어루만지며 보드라운 미소로 말했다.

"달래 간장은 기정이가 만든 거야."

희옥 할머니가 덧붙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할머니들이 서로의 노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모습이 정다워 아름답게 느껴졌다.

"먹을 건 없지만 배고플 텐데 그냥 배 채운다 생각하고 어서 드셔봐.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


"저 콩나물밥하고 달래 간장, 없어서 못 먹지 엄청 좋아해요! 아 너무 맛있어 보여서 침이 고여요. 정말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복자 할머니의 걱정이 살짝 섞인 목소리에 씩씩하게 대답했다. 밥솥에 담겨있던 콩나물밥을 주걱으로 잘 뒤섞어 밥그릇에 방금 퍼 놓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위에 달래 간장을 얹어 쓱쓱 비볐다. 호호 입김을 불어 약간 식힌 밥 한 술을 입에 넣고 꼭꼭 씹으니 입안에 향긋한 달래 향과 고소한 콩나물 향이 퍼져 눈물 한 방울이 맺힐 정도로 맛이 있었다. 콩나물의 아삭아삭한 소리가 귓가에도 울려 미각과 청각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고된 노동 후 먹는 식사라서 그런지 입맛이 더 돌았다.


그런데 희옥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손뼉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애고! 내 정신 좀 봐, 김 구워 놓고! 어디다 뒀지? 아, 여기 있네! 애고고."

멋쩍은 지 생긋이 웃으며 냄비 뒤에 가려져 있던, 구운 김이 담긴 접시를 보물찾기 하듯 식탁 위로 가져왔다. 희옥 할머니가 김을 찾던 몇 초 동안 우리 셋은 그대로 멈춰있다가, 식탁에 보물인 김이 놓이자 잠시 후 모두들 한 장씩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구운 김 한 장을 손바닥 위에 침착히 올려놓고, 콩나물밥 한 술을 적정량 넣고, 밥 위에 달래를 젓가락으로 집어 소량 얹어두고, 달래 간장을 살짝 끼얹고 나서야 정성스럽게 싼 김쌈을 한 입씩 먹었다. 정말이지, 계절과 자연의 맛이 한껏 어우러져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솔직히 김하고 밥만 있어도 맛있는데 구운 김과 콩나물밥, 달래 간장이라니. 정다운 할머니들처럼 완벽한 조합이었다.

맛에 심취되어 짜금거리며 움쑥 먹고 있는데 인자하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너무 우걱우걱 먹었나? 진정하고 천천히 먹자.'


입안에 음식이 한가득 있어 말은 못 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할머니들을 향해 양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곤 수줍게 웃었다.

배부르게 먹고 난 후 약간의 씨름 끝에 설거지는 당당히 내가 차지할 수 있었다. 설거지를 야무지게 끝내고 흡족한 미소로 뒤를 돌자 할머니들은 옹기종기 바닥에 모여앉아, 환기할 겸 문을 활짝 열어놓은 마을회관 밖의 풍경을 평온히 감상하고 있었다. 난 쪼르르 곁에 가 앉아 풍경이 가져다주는 상쾌한 바람을 쐬며 멍하니 밖을 구경하는 데 동참했다. 서울이었다면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도 핸드폰부터 봤겠지만 여기선 고즈넉한 자연을 관찰하는 게 훨씬 더 재미있었다.

할머니들은 매일 하루의 반 이상을 함께, 밥 먹고 쉬고 텔레비전 보고 산책하고 군것질하고 정자에서 담소도 나누면서 심심치 않게 지낸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보니 저녁까지 마을회관에서 먹고선 배부른 몸을 이끌고 슬슬 집으로 향했다. 돌멩이, 모래, 흙이 섞인 오돌토돌한 길을 걸으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사각사각, 바삭바삭 소리를 듣는 게 새삼 좋았다. 잘 먹고 잘 쉬었던 고소하고 향긋한 날, 마음이 가뿐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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