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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7. 첫 번째 문

소설


사회 초년생을 졸업하고 일 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적어도 이곳엔 청춘에 가려졌는지, 독기 어린 가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에, 올해 신입사원으로 들어간 친한 과 선배와 학교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언니 진짜 축하해! 정직원 되기 정말 힘든 곳이잖아. 엄청 열심히 준비했겠다. 대단해 언니, 부러워!"


"에이 운이 좋았어. 너무 좋긴 해. 무엇보다도 이제 취업 걱정은 끝이니까. 암튼 오늘 반차 내고 학교에서 서류 뗄 게 있어서 온 김에, 너 밥 사주고 싶어서."

얘기를 나누며 즐겁게 먹고 있는데 선배는 뜬금없이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아참, 근데 풀잎아. 너 혹시 전에 인턴 동기였던 진상?이라는 사람이랑 만나?"

아예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 밥 먹다가 뿜을 뻔했다. 너무 놀라서 튀어나올 듯한 눈을 하고 다급하게 외쳤다.

"뭐? 그게 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연히 절대 아니고 그럴 리도 전혀 없지! 왜?"


"그렇지? 왠지 아닐 것 같았어. 전에 동기들하고 잘 지내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었고. 너한테 들은 얘기도 없었는데 이상하다 싶었지."

선배는 이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가 막히다 못해 등골이 서늘해지는 얘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어제 회사 식당에서 밥 먹는데 타 부서 팀장하고 우연히 같은 상에 앉게 됐거든. 진상 그 사람이 그 부서에 속해있었나 봐. 내가 너 학교 선배라는 걸 알고 나서 얘기를 꺼내더라고. 그 사람이 얼마 전에 회사에 뭐 사들고 인사하러 왔었대. 근데 풀잎이 너랑 회사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이 있다면서 뭔가 숨기는 듯 의미심장한 투로 말해서 다들 관심을 가졌었다는 거야. 인턴이었을 때도 너랑 자주 얘기 나눈다며 잘 아는 것처럼 말했었고. 그러면서 그 부장이 대뜸 풀잎 씨가 회사에 조용히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둥 시대착오적인 말을 늘어놓길래 내가 아닐 거라고, 풀잎인 지금까지 남자친구 있던 적도 없었고 너랑 자주 연락하는데 들은 적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지. 그런데도 에이 하면서 내가 아니라고 해도 다들 그냥 웃고 믿지를 않는 거야. 어쨌든 네가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말해주려고 했어."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머릿속에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가 친 듯 혼란스러워 어지러움에 속까지 울렁거렸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회사에 이미 기정사실화되었을 생각을 하니, 내 이미지는 결국 상사에게 여우짓 떨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척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고양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열이 오르고 치가 떨렸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답답해서 뒷골까지 당겼다.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사람에게서 받는 힘듦을 애써 무시하며 후회 없을 인턴 생활을 위해 노력한 일 년이 결국은 타인의 나쁜 소문에 의해 얼룩지다 못해 부서지고 훼손돼 버린 느낌에, 무너져내릴 듯했다. 환멸감까지 들었다. 우선 흥분한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진상은 당시 30세로 인턴 동기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묻지도 않는데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쏟아내곤 했다. 예의상 들어주긴 했지만 말 많은 사람과 있으면 기가 빨리는 성격이라 솔직히 좀 피곤했었다. 그걸 설마 평소 자주 대화한다고 표현한 건가? 대화가 아니었다. 동기들과 다 같이 있던 자리에서 진상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냈을 뿐이었다.

일적으로 주말에 잠깐 딱 한 번 만났었던 것 같은데 그뿐이었다. 당연히 서로 아무 사심 없이 일과 취업 관련 정보만 얘기한, 적어도 난 결백한 공적인 만남에 가까웠다. 그냥 '일'이라고 여겨 기억 저 뒤편으로 넘어간 의미 없던 하루를, 왜 회사까지 다시 찾아가서 허언을 내뱉은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머릿속을 설핏 스치는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동기들끼리 회의실에서 모여 있다가 사는 곳 관련해서 얘기가 나왔는데 진상은 굳이 아파트 이름까지 말했었다. 다른 동기들이 엄청 비싼 곳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며 부러운 듯 치켜올리자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주말이라 친구를 만나러 가 기다리고 있는데, 들었던 아파트는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는 진상과 우연히 마주쳤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목례를 했는데 갑자기 반가워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노골적인 시기, 질투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도 방관하고 일조한 행동을 보였기에 불편했다. 역시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말했다.

"풀잎 씨, 누구 기다리나 봐요. 제가 사는 곳이 여기라고 설명하면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들어서 근처에 있는 아파트 명을 말하는 게 편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딱 만나니까 신기하네요."

난 사실 아무 관심이 없어서 굳이 설명하지 않았으면 그저 나처럼 지인 집에 왔거나 가족 집에 방문했겠지, 정도로만 여겼을 텐데 왜 먼저 찔리는 듯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을까 하는 물음표가 생길 뿐이었다. 아마도 내가 회사에서 떠벌릴까 봐 미리 선수쳐서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남 이야기 전하는 것을 경멸하는 쪽이라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사는 곳을 보통 지역 정도만 얘기하곤 마는데 굳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말하는 게 뭐가 편한 거지,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둘러대도 될 텐데 먼저 얘기하는 거 보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니까 정말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역시나 기억 저 뒤편으로 넘겼었다. 그러고 보니 저 기억까지 치면 밖에서 본 건 두 번이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갈구하기 위해 비싼 집에 살며, 이성에게 인기 있는 남자인 양 본인을 꾸미고 싶어 거짓말을 일삼는 인간이었을까, 인턴으로 일했던 곳의 신입사원이 되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어 시기하는 경쟁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싶은 인간이었을까, 그저 타인에게 앞에선 아닌 척하며 뒤로는 훼방과 해코지를 놓는 소시오패스였을까, 아니면 설마 자신의 약점을 들킨 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어 알게 된 상대방에게 나쁜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인간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의도로 진상이 그런 헛소리를 지껄인 건지 선배와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지만 본인 외에는 그 검은 속내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데 딱 그랬다. 어떤 이유일지, 실은 다 맞는 이유일지, 그 사람만이 아는 이유일지는 아직도 모른다.

처음 들었을 땐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해 당장이라도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따져 묻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우스웠다. 나만 이상한 사람만 될 게 뻔했고 단 1초라도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 똑같이 찾아가 해명할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럴 가치조차 없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건 온갖 소문이 나를 망가뜨렸다는 것이었다. 내 열정과 의욕, 노력이 잘못이었을까? 당찬 꿈은 점차 균열이 생기다 결국엔 와장창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회사에선 항상 소문이 들끓는 듯했다. 지방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서울에 집을 사게 돼서 이직을 한 지인은, 실은 배우자와 이혼해서 서울로 도망치듯 떠난 거라고 이전 회사에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서울에 땅을 산 게 배 아팠던 거다. 지인은 그저 웃으며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스스로 최면을 걸어 믿고 있어야 속 편하지, 아니라고 하면 믿고 싶지 않아 할뿐더러 오히려 배 아파 더한 소문을 낸다고, 그냥 놔두면 어차피 알아서 인생을 망쳐 갈 거라고 잔잔히 말했었다.

또 다른 지인은 회사에서 상을 자주 받자 돈을 주고 산 상이라는 유치한 소문이 나돌았으며, 어떤 지인은 직장 동료에게 방송국 근처에 산다고 대략적인 집의 위치를 말했는데 회사 전체에 지인 부모가 방송국에서 근무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소문을 내는 이들과 재미에 휩쓸려 소문을 전하는 이들은, 회사에서 타인을 헐뜯으며 자신들의 결핍을 달래거나 자신의 삶이 지루하고 처량해 남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동안은 선의와 악의가 비교적 명확히 분별이 된다고 장담했었는데,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찌그러진 마음과 구겨진 시선으로 세상을 일그러지게 바라보는 이를 찾아내 구별하기란 쉽지 않았다. 악의는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이는 웃으며 등에 칼을 꽂았고, 선의의 행동을 해도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해를 만들었다.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항상 곱지는 않았으며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은 나에게 해를 얼마든지 끼쳤다.

인턴으로 있던 회사는 좋은 기억, 좋은 사람들이 분명 더 많았다. 그렇지만 검은 물감 한 방울이 하얀 물감 전체를 오염시키듯, 분명 행복하게 출발했던 첫 회사 생활은 뒤돌아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얼룩진 잿빛 기억으로 남았다.

타인의 거짓된 말은 한없이 가벼워 붕붕 뜨며 쉽게 번져만 갔고, 그 말들이 합쳐지고 쌓여서 또 공기 중의 온갖 먼지까지 묻어 나에게로 돌아왔을 땐 그 말 덩어리가 너무 무겁고 크고 날카로워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처음엔 혹여나 내 행동과 성격에 문제가 있던 건 아닐까 하며 나에게서 원인을 찾아보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한 교육기관에서 5개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들은 똑같은 나였는데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했다.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인 양 괴물처럼 변해버릴까 봐, 그래서 또 상처받는 상황에 놓일까 봐 조심스러워 정을 주기가 무섭고 두려웠다. 사람을 쉽사리 못 믿게 되었다.

그렇게 첫 번째 마음의 문을 닫았다. 마음의 문이 닫혔다는 표현이 더 알맞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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