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늦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기상하곤 했었다. 시골에 온 뒤로는, 어제와 또 다른 아침이 밝았다고 오늘은 어떤 모험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며 신나서 조잘대는 새소리에 나도 설레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러면 상쾌한 아침 공기가 반갑다며 코를 간지럽혔다.
뜨끈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고 싶어 이부자리를 정리 후 일어났다. 물이 끓는 동안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감상했다. 방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작은 숲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다 끓인 보리차를 컵에 한 잔 쪼르르 따라서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마셨다. 그럴 때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보리차가, 삭이고 삭여봐도 목까지 차올라 울컥거리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씻어내리는 듯해 마음이 비워지며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빈 공간엔 구수한 온기가 가득 채워져 다행히 시리지 않았다. 보리차를 마시는 따듯한 시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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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계약하기 전 이곳을 보러 왔을 때 부동산 사장님에게 숲에 관해 물었었다.
"사장님 그런데 저 숲이요, 아까 차 타고 오면서 보니까 표지판에 출입 금지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네, 예전부터 그랬을 거예요. 들어가진 못해도 마을에서 숲이 바로 보여서 경치가 좋아요."
예전 고춧가루 집이 있던 곳과는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이 마을 자체도 처음 와 본 것이었지만 꽤 가까이 숲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당시 숲으로부터 받았던 첫인상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해 묘하다는 것이었다. 지낼 공간이 마음에 쏙 들었지만 저 숲도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아, 그리고 저 숲에는 옛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도 있대요. 나중에 마을 주민분께 들어요."
부동산 사장은 그저 빙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해주었지만 나에겐 그 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옛날 옛적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는 숲이라, 왠지 신비로운 마을 같아서 더 좋았다.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면 마치 동화 속 세상에서 살아가는 느낌이 들 것만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전래동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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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을 회관에서 잡채를 만들어 먹기로 한 날이라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에 온 첫날은 짐이 워낙 많아서 장을 거의 봐오지 못했었다. 챙겨 온 인스턴트 음식이 전부였다. 그래서 원래의 계획은 오늘 시내로 나가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런 내게 할머니들은 솔깃한 제안을 했다.
며칠 후면 시내에 장이 열린다며 끼니는 어차피 마을회관에서 대충 때우면 되니가 장날 함께 가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야 좋지만 이곳에 온 후로 자꾸만 얻어먹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이었다. 매번 대충이라고 하지만 항상 정성이 가득한 식사였고 진수성찬이었다. 하지만 홀로 쓸쓸하게 시내에 나가는 것보단 그녀들과 같이 정겨운 시장 나들이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하여 염치는 없지만 장날 시내에서 맛난 걸 대접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할머니들의 제안에 덥석 응한 것이다. 대신 잡채를 완성시키는 일에 아주 든든한 조력자가 되기로 했다.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할머니들은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각자 소중히 챙겨왔을 음식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당면, 부추, 당근, 느타리버섯, 양파, 그리고 만두피...? 물음표는 머리 위에 잠시 띄워 놓고 잡채로 만들어지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있는 재료 옆에 내가 가져온 표고버섯을 슥 올려두었다. 다행히도 표고버섯을 대용량으로 사 왔던지라 아직 남아있었다. 이거라도 재료를 챙겨올 수 있어 빈손이 아니라 마음이 그나마 편안했다.
인사를 우렁차게 건네곤, 어서 오라고 눈웃음을 짓는 복자 할머니를 향해 질문했다.
"할머니, 이 만두피는 뭐예요?"
"하는 김에 잡채 만두도 만들려고. 만들어 놓으면 군만두, 물만두, 찐만두, 만둣국 다 요긴하게 해 먹을 수 있잖아."
나는 속으로 오! 하고 외쳤다. 채소 다진 것 조금과 당면만 들어가는 당면 만두를 참 좋아하는데 파는 곳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질리지도 않고 떡볶이와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는 당면 만두. 그런데 잡채 만두라니. 먹어본 적 없지만 귀한 잡채가 만두피 속에 담기는데 당연히 맛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입맛을 다시며 소매를 걷고 손부터 깨끗이 씻었다. 먼저 할머니들과 함께 각자 맡은 재료들을 손질했다. 씻은 재료들을 먹기 좋게 채 썰고 각각 볶았다. 그리곤 삶은 당면을 담아놓은 큰 대야에 볶은 재료들을 한데 담았다. 기정 할머니, 희옥 할머니, 복자 할머니는 한 명씩 교대로 간장, 설탕, 참기름, 통깨 등의 양념을 휘리릭 아무렇게나 눈대중으로 넣은 다음, 골고루 섞어 영롱한 빛깔의 아름다운 잡채를 만들어냈다. 할머니들의 무심한 모습은 마치 짜인 안무에 맞춰 멋진 춤을 추는 듯 화려하고 대단해 보였다.
기정 할머니는 맛을 보라며 잡채 한 움큼을 입에 한 가득 넣어주었다. 분명 서로 상의하지도, 간을 보지도 않으며 양념을 막 들이부은 것 같았는데 간이 딱 알맞고 예술이었다. 맛있는 음식도 늘 먹으면 싫다는데 너무 맛있어서 매일매일 먹고 싶을 정도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연신 감탄을 표했다.
여럿이 모여서 하니 보기엔 빠르고 쉬워 보일 수 있어도 잡채는 손이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정성이 가득 담긴 지극한 요리다. 그래서 잡채 하면 명절, 잔칫날, 생일이 떠오를 정도로 아무 때나 먹기 힘든 음식인데 내가 뭐라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환영하고자 아낌없이 정을 주는 그녀들의 노력이 마음 가까이 와닿아서, 마음을 자꾸 울렁이게 해서, 자꾸만 글썽글썽한 눈이 되는 걸 말렸다.
잡채 만두는 식사 후 만들기로 하고 우리는 식탁에 모여 앉아 완성된 잡채를 먹기 시작했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잡채 한 젓가락 얹어다 한 입, 뜨끈한 밥 조금 한 입. 천천히 꼭꼭 씹다 입술이 기름에 번들거릴 때쯤 기정 할머니가 집에서 가져온 겉절이도 곁들여 또 한 입. 참으로 황홀한 맛이었다. 이렇게 먹다 보니 금세 밥그릇이 텅 비었다. 당면은 금방 배가 차니 밥을 반 공기만 펐는데도 평소보다 배가 훨씬 불렀다. 여기 와서 하도 나날이 잘 먹고 있어서 내 위가 감지덕지해하면서도 갸우뚱거릴 것 같았다.
먹을 만큼 덜어다 먹고 대야에 남겨두었던 잡채는 귀한 반찬이니 여러 통으로 나눠 담아 회관에 있는 냉장고에 넣었다. 그중 한 통은 집에 가져가서 먹으라고 따로 챙겨놓은 소중한 내 것이었다.
냉장고에 들어갔던 잡채는 꺼내 데우지 않고 차갑게 먹어도 오독오독한 식감에 맛있다. 살짝 딱딱해진 잡채 면을 뜨끈한 밥에 올려 찬기를 녹여가며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게 싫을 땐 프라이팬에 잡채를 볶아 데워서 먹어도 되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어도 좋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잡채'라는 이름의 요리는 반찬으로 따로따로 쓰일 수도 있는 다양한 매력을 지닌 재료들이 모여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아예 새로우면서도 더 풍성한 맛을 낸다는 사실이 먹을 때마다 신기하고 경이롭다. 충분히 홀로 설 수 있었던 훌륭한 재료들을 한데 모이게 해 놓고 덜 훌륭한 결과물을 내고 있는 회사와는 다르다. 문제 있는 나쁜 재료로 인해 재료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게 돼서일까, 각자의 매력을 인정하지 않고 한 가지 재료인 양 단일의 맛으로 통일시켜서 일까. 다만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재료 하나를 홀로 설 수도 없게, 무력하게 만드는 회사가 잡채만 같으면 좋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