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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9. 잡채랑 만두랑(2)

소설


배불리 먹은 우리는 대자로 누워 살랑이는 선선한 바람에 인사하듯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며 쉬었다. 오후 4시가 지난 시각, 텔레비전을 틀어놓고는 바닥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잡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가위로 잘게 자른 잡채를 만두피에 소로 넣었다. 그런 다음 만두피 가장자리에 물을 묻혀 납작하게 반달 모양으로 완성시켰다.

살면서 만두를 만들어 본 적은 손에 꼽았다. 오래간만에 만드는 게 왜 이리 즐거운 지,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리도록 힘들었지만 멈출 수 없는 재미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손도손 얘기 나누며 빚다 보니 그 많던 만두피를 다 썼다. 바로 먹을 것만 따로 놔두고 나머지는 모두 나눠 담아 냉동실에 보관했다.

값진 노동을 했으니 이제 다시 먹을 차례였다. 반은 찜기에 찌고 반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튀기듯 구웠다. 그 사이 간장, 식초, 고춧가루를 섞은 양념장도 준비했다.

잡채 만두는 당면 만두보다 풍부한 맛이 났고 잡채와는 또 다른 맛이 났다. 잡채를 만두피로 한 번 감쌌을 뿐인데 색다른 맛을 낸다는 게 신기했다. 하얀 포장지 위에 잘게 자른 잡채를 올리곤 숟가락으로 따독따독하면서 마음과 함께 포근하게 감싸서 그런가, 혹은 반달 모양으로 성심껏 빚어 소에 달빛이 스며들어서 그런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송이는 몽실몽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달처럼 밝고 환해서 맛이 반짝거렸다.

동시에 오독오독, 톡톡, 쫄깃쫄깃, 미끄덩미끄덩, 탱글탱글, 아삭아삭, 하고 알록달록한 식감이 입안을 뱅글뱅글 감돌았다. 여기에 촉촉하고 고운 맛이 어우러지면 찐만두이고, 바삭바삭 촉촉한 맛이 어우러지면 군만두였다.

이른 저녁을 만두로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고 저마다 집으로 향했다. 기름으로 번들거려 광이 나는 얼굴을 하고 할머니들이 싸준 잡채와 만두를 손에 가득 쥔 채 느른하면서도 가뿐가뿐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늘빛은 엷어지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는 듯 발그레 잔물지는 꽃노을을 바라보니 내 마음에도 진홍빛의 노을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잡채와 만두를 냉장고와 냉동실에 각각 넣어두고 씻을 준비를 하곤 바로 화장실부터 들어갔다. 기름 때문에 찝찝한 느낌이어서 얼른 뽀드득뽀드득 씻어내고 싶었다.

"엇! 뭐야?"

목욕이 거의 끝나갈 무렵, 화장실 전등 불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했지만 이대로 나갈 수는 없으니 거품을 마저 물로 헹궈내고는, 침착하게 주섬주섬 수건을 찾아 물기를 닦고 옷을 어찌저찌 찾아 입었다.

나와 보니 방안의 불도 꺼져있었다. 시골이라 더 그런 건지 어둠이 금세 마을과 집을 삼켜버린 것처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두었던 핸드폰을 더듬거리며 찾아내었다. 핸드폰의 손전등을 키곤 방안이 환해진 김에 스킨로션을 얼굴에 발라 토닥이며 벌떡이는 심장도 함께 진정시켰다. 머릿속으로는 두꺼비집부터 확인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정전된 지 15분 정도가 흘렀을까.

고요함을 가르고 누군가 갑자기 똑똑똑, 하고 집 밖에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 놀라서 멈칫하곤 그대로 굳어있었다.


'누구지? 할머니라면 다행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할머니들과는 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 만약 할머니들이 아니라면 낯선 사람일 텐데, 불이 나가버린 것도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그 몇 초 동안 이런저런 별생각이 다 들어서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일단 현관문은 잠겨있으니 시끄럽게 고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핸드폰을 손에 땀이 날 만큼 힘껏 잡아 쥐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슬며시 열어 손전등은 밖을 향하게 하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아악! 눈부셔!"

누군가 집안 내부를 향해 손전등인지 불빛을 비춰서 난 엉겁결에 소리를 냈다. 환한 불빛에 밖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곧 상대방의 불빛이 꺼지고, 켜져 있던 내 핸드폰 손전등으로 유리로 된 현관문 밖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체는 바로, 아까의 나처럼 눈이 부셔 찌푸린 채 입만 배시시 웃고 있는 기정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손바닥을 활짝 펴 좌우로 흔들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웃는 모습을 보자 걱정됐던 마음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져, 부랴부랴 신발을 신고서 잠겨있던 현관문을 열고는 물었다.

"에구, 무슨 일 있으세요? 좀 전에 갑자기 집에 불이 다 나가서요..."

"무슨 일 있기는, 우리도 정전됐어. 핸드폰으로 전화해 보니 새벽 정도에 복구 예정이라네. 여긴 간혹 정전이 잘 되거든."

"아, 저희 집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안 그래도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데 불이 꺼진 데다, 나와있는데 느닷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엄청 무서웠거든요, 휴."

깜짝 놀란 상황에 기정 할머니 얼굴을 마주하고 설명을 들으니 안심이 되어 이제야 맘 놓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유, 괜히 놀라게 했나 보네. 걱정돼서 와 봤어. 무슨 일인가 모를 것 같아서. 저녁 즈음 이럴 땐 늙은이들 덜컥 겁이 나서 마을 회관에서 모여 있다가 자거든. 밤 되면 어차피 캄캄해져서 자면 되긴 하지만 저녁부터 이러면 할 것도 없고 해서. 여기서 혼자 있다 자도 괜찮겠어? 아니면 마을회관에 가서 같이 자도 되고."

얘기를 듣자 하니 이곳에선 정전이 되면 보통 4-5시간 후 불이 다시 들어오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저녁부터 이럴 경우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마을회관으로 모인다고 했다. 물론 금방 복구될 때도 있고 오래 걸려도 밤, 새벽이면 복구될 테지만 사람들에게 당연히 귀찮게만 여겨지는 불편한 정전이, 할머니들에게는 모여서 잘 수 있는 즐거운 핑계가 된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 정전이 있는 날은 곧 일상을 벗어나는 특별한 날이 되는 것이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 할 일도 못하고 누워서 핸드폰만 하다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울에서는 늘 그랬었는데도 아주 따분할 것 같았다. 또 아직은 그래도 낯선 공간인데 어둠 속에서 혼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게 느껴져, 어쩌지 고민하다가 기정 할머니를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다.

"풀잎이 이불하고 베개는 챙겨가야 해."

그러고 보니 기정 할머니도 무언가 갖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이불과 베개를 귀엽게 품에 안고 있는 거였다. 핸드폰 손전등을 켠 채로 방으로 들어가 이불, 베개를 돌돌 말아 집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가로등 불빛마저 없으니 길거리는 암흑 그 자체였다. 기정 할머니와 내가 함께 만든 빛의 길을 따라 마을회관으로 발밤발밤 밝게 걸어갔다. 문득 수학여행이 떠올라 자꾸만 설레고 들떠서 잔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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