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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10. 어둠 속 무서운 이야기

소설


마을 회관에 모여 각자 챙겨 온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있는데, 새삼 이런 내가 놀랍게 느껴졌다. 낯을 많이 가리는 데다 어른들을 어려워하는 성격을 지닌 나라서, 마을에 온 첫날 만 해도 내가 이곳에서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며칠 만에 할머니들과 급속도로 친해지고 이젠 또 함께 잠을 잔다는 게, 상황이 그렇게 이끌어주는 것 같아 마냥 신기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마을에 구성원으로서 자연스레 잘 녹아들고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흐뭇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싱숭생숭해 눈이 점점 초롱초롱해져가 애꿎은 이불만 뒤적이며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 유독 부각되는 소리에, 궁싯거리는 내 모습이 그려졌는지 희옥 할머니는 물었다.

"아무래도 낯설어서 잠이 잘 안 오지?"


"네..., 전 보통 거의 12시 훨씬 넘어서 자거든요."


"늦게 잠드는구나. 그럼 그때까지 할 거 하는 거야?"

"네, 취미 삼아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요. 어쩔 땐 책을 읽거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하고요."


"좋네. 뭐든 억지로 하지 말고 쉬엄쉬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최고야. 그래야 탈이 안 나지."

일이 아닌 취미를 하며 지내고자 이 마을로 왔다는, 듣기에 무모할 수도 있는 삶에 대해 어르신들이 안 좋게 바라보진 않을까 걱정했었다. 이튿날 열린 비즈 교실에서 이야기했을 때 할머니들은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힘이 나게도, 응원 섞인 말로 나의 선택을 북돋아 줄 뿐이었다.

잠깐 흘렀던 정적을 깨고, 복자 할머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마을회관 안을 메웠다.

"옛날이야기나 무서운 이야기해 줄까?"

어두컴컴해 보이진 않았지만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복자 할머니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떠올라 흐흐 웃음이 났다. 귀가 솔깃한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던 얘기가 문득 생각나, 이참에 물었다.

"아 참, 저 숲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고 부동산 사장님께 들었었는데..., 궁금했어요!"


"숲?"

기정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되묻더니 덧붙여 말했다.

"그 전설은 복자 언니가 잘 알지. 복자 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거든."

그렇게 복자 할머니는 숲의 전설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한 이야기꾼이 있었어. 그 옛날 옛적 이 마을엔 아주 어여쁘고 귀여운 어린이도 살았지. 이름이 아마 복자였다고 하지?"

방심한 채로 듣다가 천연덕스러운 복자 할머니의 재치에 다들 웃음이 쿡쿡하고 터졌다.

"아무튼 그 이야기꾼은 조선 후기 때부터 조상이 대대로 전기수였다고 했어. 그래서 이야기를 전하는데 사명감이 있었고 어찌나 말 재주가 좋은지, 그가 마을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딱 시작하면 동네 주민들이 금세 모여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말에 흠뻑 빠져들곤 했지. 점심 먹은 후에 듣기 시작했는데 저녁 먹는 것도 새까맣게 잊을 정도였다니깐.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숲에 관해 물었어. 지금 풀잎이 너처럼. 왜냐하면 옛날부터 저 숲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있긴 했는데 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몰랐었거든. 어른들도 그저 자신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들의 어른들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의를 들었다는 거야, 이유는 모른 채. 그래서 아마 사람들은 이야기꾼이라면 마을과 마을을 옮겨 다닐 때 혹여나 숲을 지나오지 않을까 생각한 것 같아. 아니면 전기수 집안이니 알고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겼거나. 어쨌든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거들며 저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냐, 저 숲에는 도대체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냐, 혹시 숲에 관해 아는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어. 그러자 이야기꾼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어. 본인도 목숨은 하나라서 오래 걸린다 한들 숲을 피해 빙 돌아서 이곳저곳을 다닌다고 말이야. 전기수였던 집안 어르신이 숲에 관한 이야기를 일러주며 하도 주의를 줬다는 거지. 그 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그의 숲 이야기가 얼른 시작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어."

복자 할머니는 침을 한 번 꿀떡 삼키고는 이어 말했다.

"이야기꾼은 자신도 들은, 아주아주 옛날 옛적 이야기라며 말해주었어. 그때는 숲이 워낙 우거져서 굳이 들어가는 사람이 잘 없었을 뿐 딱히 금기시되지는 않았었대.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마을에 사는 한 사내가 매일 그 숲을 드나들고 있다는 얘기가 동네에 돌았대. 누가 봤다는 거지. 마을 사람들은 저 들어가기도 힘든 우거진 숲에 뭐가 있길래, 매일이고 꼬박꼬박 잊지도 않고 가는 건가 하고 이상하게만 생각했대. 누군가 그 사내에게 물어도 고개만 저을 뿐 대답을 해 주지도 않고. 그러길 한 이주가 지났나.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사내의 얼굴이 수척해져간 거야. 살이 빠진 건 물론 핏기가 점차 사라져 꼭 금방이라도 저승사자가 데려갈 것 같은 몰골이 된 거지. 하루는 마을 사람 한 명이 그 숲 근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막 기겁을 하면서 숲속에서 굴러 나오는 이 사내를 발견한 거야.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얼굴에는 상처에, 옷은 찢어져 있고, 흙이 묻었는지 꾀죄죄하고. 여하튼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거지. 사내를 보고 놀란 이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다 같이 부축해서 사내 집으로 데려갔대. 집에서도 사내는 어딘가에 홀린 듯 계속 중얼거리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벌벌 떨기만 해서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추워서 그러는 걸까 봐 따듯한 물을 먹이고 이불을 여러 겹 덮여서 안정을 취하게 하곤 물었다는 거야. 저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왜 그동안 매일 숲을 드나들었는지. 그러자 사내는 부들부들 떨면서 경직된 표정으로 횡설수설 말했대. '숲이 살아있다고.' 숲은 자신에게 귀가 떨어지도록 소리쳤고, 숲 안의 나무들과 풀, 돌들이 거대하게 커져 자기를 집어삼키려고 했다고 말이야. 사람들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내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우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뒤숭숭한 분위기 속 각자 집으로 흩어졌대. 그리고 다음날..., 사내는 죽었어."

"네에?"

집중해서 듣다 결말에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반응했다.

"아 죄송해요. 계속 얘기해 주세요."

"전날 그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으니 걱정되는 마음으로 누군가 그 집을 찾아갔는데, 사내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는 거야."

"아이구, 너무 안됐네요..."

"그런데 그 뒤로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거지. 아이들이 공을 갖고 놀다 실수로, 숲속에 공을 던진 거야. 사내 사건을 듣기도 했고 어른들의 경고에 공을 그냥 잃어버린 셈 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숲 밖에서 공이 발견됐대. 시커멓게 썩어버린 채로. 마치 숲이 공을 우물우물 씹어버리다 뱉어낸 것처럼 말이야. 그 후로 사람들은 숲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또 전했지. 숲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얘기도 있고, 숲에 붙은 귀신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하여튼 사람이 아닌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숲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숲을 범하는 것은 발을 들인 이상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그렇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야. 홀려서 자신도 모르게 계속 숲을 찾게 되고 눈에는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이고 귀에는 들리면 안 될 것이 들리며 병들어 간다는 거지. 영혼이 집어 삼켜져 불행한 삶에 치닫게 되거나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그런 전설이 있어, 저 숲에는."

"흠... 그럼 정말 전설대로 숲에 뭔가가 있어서 사내가 죽게 된 걸까요?"

"내가 실은 저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 아유 근데 화장실이 급해서 우선 다녀와야겠다."

복자 할머니를 시작으로 다들 차례차례 화장실을 방문했다. 지금 이 순간 화장실이 마을회관 안에 바로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정 할머니와 희옥 할머니는 이미 많이 들었던 이야기인데도 항상 새롭다며 혹여나 방해될까 소변을 참고 있었다고 했다. 세면대 위에 세워놓았던 손전등은 마지막 순서인 내가 챙겨 나왔다.

얘기를 마저 들으려고 서둘러 나오는데 마을회관 안에는 배경음악이 깔리고 있었다. 새근새근하는 여러 명의 코골이 음악... .

내가 화장실에 있는 단 몇 분 사이 할머니들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바로 잠이 드신 거람, 하면서 핸드폰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였다. 오늘 하루가 워낙 고되기도 했고 할머니들은 보통 밤 9시면 잠자리에 든다고 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다고 단번에 수긍했다. 아쉬웠지만 궁금증은 뒤로하고 잠에 들어야 했다. 왠지 오싹했지만 할머니들의 코골이를 자장가 삼으니 안심이 되어 나도 곧 꿈나라로 향할 수 있었다. 마법 수면 재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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