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하구름 Oct 27. 2024

12. 정직원(1)

소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내 삶의 두 번째 직장이었고, 정규직으로선 첫 번째 직장이었다. 인턴을 하면서 겪은 부정적인 기억들 때문에 걱정이 많았었지만, 이곳엔 악인 자리에 오를 정도의 인물은 다행히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기업의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있어 열정이 마구 샘솟았었다.

악명 높은 팀장이 본사로 다시 오게 된,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난 얼굴조차 본 적 없는, 타 지역에 있었던 팀장이 본사로 복귀한다는 얘기와 동시에 들리던, 그에 대한 악명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치 신고식처럼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보고서를 면전에 대고 던진다는 것, 그래서 매번 신입사원들이 눈물을 꼭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평판이 아닌 소문이길, 부디 과장되었길 바랐지만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음에도 팀장의 악명은 사실이었다는걸, 오히려 미화되었다는 걸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악인의 자리에 당당히 오른 팀장으로 인해 나의 평탄했던 회사 생활은 또다시 끝이 나버렸다, 더 냉혹하게도.

한 달에 한 번, 금요일이면 보고서 발표가 있었다. 팀장이 서울로 오고 나서는 그가 상사였기에 보고서를 준비하는 내내 틈틈이 확인받아야 했다. 초반에는 보고서 주제와 내용에 관해 간혹 칭찬이 담긴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웬일이지, 타 지역에서 일하며 사람이 좀 바뀌었나 하고 기대와 안심, 방심 그리고 섣부른 오해를 잠시나마 했었다.

발표일을 일주일 앞두고 팀장은 갑작스레 날 불렀다. 발표를 앞둔 마지막 점검이라 생각하며 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보고서 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서 안 그래도 팀장님께 점검받으려고 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팀장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잘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던지듯이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풀잎 씨, 보고서가 전체적으로 다 이상하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애초에 왜 이런 주제를 정했는지 모르겠어. 지금이라도 바꿔."

아무래도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악몽이 아니라면 삼 주 동안 준비한 보고서를 고작 발표 일주일 앞두고 갈아엎으라는 게, 그것도 팀장 본인이 좋다고 승인했던 주제를 바꾸라는 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싶었다. 터무니없는 팀장의 말에 넋이 잠시 나가, 말문이 막힌 채로 그저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어? 계속 앞에 서 있을 거야?"

팀장의 싸늘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팀장님, 발표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고, 그동안 분명 팀장님께서도 주제 좋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 팀장은 내가 건넸던 보고서를 내 눈앞에 흩날리게 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팀장이 바꾸라면 바꾸는 거지,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와. 말로만 듣던 보고서 던지기였다. 익히 들었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역시라는 생각과 함께 황당했고, 팀장이란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의구심이 들었다. 삼주라는 시간 동안 내 보고서 주제를 승인하고 점검할 때마다 호의적이었던 팀장과, 얼굴만 똑같을 뿐 다른 사람이지 않을까? 쌍둥이 아닐까? 이중인격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니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가득했다.

"팀장님... 그럼 어떤 점이 이상한 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그에 맞춰 최대한 수정해 보겠습니다... ."

"팀장인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알아? 그런 건 알아서 하는 거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훌륭한 인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조롱과 비난이 섞인 어조로 말하는 팀장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 이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선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비상식적인 팀장의 행동에 분노가 끓어오를 뿐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단지 이상한 사람으로 인해 휘둘려지는 내 감정이, 화가 그마저도 쓸데없이 소모되는 것 같아 아까웠다.

'그래, 내가 이곳에 얼마나 힘들게 들어왔는데, 신고식을 일삼으며 부리는 저 객기 하나 못 물리치겠나. 까짓것 지금보다 더 훌륭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지 뭐.'

다짐을 하곤 신입사원의 패기로 일주일 내내 밤을 새가며 다시 처음부터 준비했다. 대망의 그날이 되었고, 난 자신감 있게 발표를 진행했다. 그리고 임원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잇따랐다, 단 한 명을 빼고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게도 팀장이었다. 내가 발표하는 내내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종일관 팔짱을 끼고 몸은 의자에 완전히 기댄 채 호의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했다. 내 발표에 대해 팀장은 처음에 진행했던 보고서 주제가 하도 이상해서 자신이 바꾸라고 했다, 다음부터는 애초에 주제를 잘 정하고 시작해야 다급하게 수정할 일도 없고 일도 서로 깔끔하게 진행된다며 조언하듯이 평가했다.

이 말은 즉 내 발표가 그나마 성공적일 수 있던 건 팀장 덕분이고, 고로 보고서를 다시 준비해야 했던 상황은 오로지 내가 만든 결과라고 탓을 넘기는 발언이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임원들은 당연히 팀장의 능력을 높이 살 것이고 말이다. 뿌듯함은 회수되고 팀장의 뻔뻔함에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신고식이 끝이 났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