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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구름 Oct 27. 2024

11. 전설과 소문

소설


개운하게 푹 잔 느낌이 들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니, 할머니들은 세잎클로버처럼 머리를 맞댄 채 나를 내려다보며 해죽이 웃고 있었다.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식탁에는 벌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아휴, 죄송해요. 제가 같이 했어야 하는데... 저 기다리느라 못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아니야, 방금 다 차린 거야. 이제 밥 먹을까?"


"다음엔 진짜 제가 꼭 다 할게요!"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어유, 무슨. 그냥 맛있게만 먹어주면 됩니다요."

돌아가며 대답하는 할머니들의 모락모락 아늑한 세 마디에 이끌려 눈을 비비곤 식탁 앞에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강된장과 호박잎쌈이었다. 평소 쌈을 좋아하는 데다 호박잎쌈을 특히 좋아해서 보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잘 삶아져 힘없이 늘어진 호박잎을 찬찬히 펼쳐 밥을 한가운데 넣고 수저로 강된장을 적당히 떠 밥 위에 촉촉하게 얹어준다. 그다음 호박잎으로 고이고이 감싸 입안에 넣고 쩌금쩌금 먹다 보면 밥 한 공기 뚝딱이다. 구수하고 담백해 쌈이 끝도 없이 들어간다. 밥도둑 중 하나. 남은 밥 한 술은 보리차에 말아 알맞게 익은 김치를 올려 먹으면 아싹아싹 아주 맛깔스럽고 개운하면서도, 밥그릇마저 깨끗해지는 뿌듯한 식사 마무리를 할 수 있다.

후식으로 과일을 먹다 호박잎의 감동에 잠시 가려졌던 어젯밤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 복자 할머니, 저 숲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고 어제 얘기하셨잖아요."

복자 할머니는 기정 할머니, 희옥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곤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내가 아마 11살 때지? 숲을 들어가려고 했던 건 아니야. 어른들이 누누이 명심하기도 했고 사람이 숲에 들어갔다가 죽었다는데 무서워서 그럴 생각은 조금도 안 했지."


"그러면 어떻게 들어가게 되신 거예요?"

"저 위쪽에 집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셨거든. 그날은 엄마가 반찬을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시켜서 그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어. 그런데 느닷없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여쁜 나비가 자꾸만 내 눈앞에서 나풀나풀 팔랑거리는 거야. 그래서 흉내 내어 나비춤을 추면서 나비를 계속 쫓아갔지. 홀렸던 게 아닐까 싶어. 암튼 흥얼거리면서 얼마나 따라갔을까, 돌부리인지 나무뿌리인지에 툭 걸려 꽈당 넘어진 거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난 이미 숲 안에 들어와 있었어. 아프기도 하고 숲의 전설 얘기가 떠올라 급격하게 공포심, 두려움이 몰려들어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어. 그런데 말이야, 울면서도 궁금하긴 한 거야. 그래서 두 눈으로 사방을 찬찬히 바라보는데 웬걸 숲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거야. 그곳은 초록빛과 노란빛이 다보록이 피어난 세상 같았어. 푸른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덕에 이름 모를 꽃들과 풀들, 돌들이 두루두루 알록달록 반짝이고 있었어. 고마운 햇살에 보답하듯 산뜻한 내음을 바람에게 전해달라고 했는지, 햇빛이 묻은 숲속 생명들은 방실거렸고. 그곳만 시간이 아주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어. 동화 속 신비로운 숲이라는 공간이 존재한다면 딱 저 안일 거야. 말로 표현이 잘 안되는데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자유로운 숲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세계엔 편안함, 행복감, 안정감이 있었어. 어린 나이였는데도 감격스럽다는 단어가 이런 뜻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지. 숲은 나무는 꽃은 풀은 잎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곳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었어, 숲의 주인이었지. 그래서 미안했어. 내가 배경이고 불청객이었으니까, 잠깐이었지만 그들의 공간, 시간, 숨을 방해했으니까, 생각 없이 무심코 내디딘 나의 발걸음에도 그들은 쉽게 부서져버리니까. 어쩌면 그 세상이 다인 그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못 볼 그 경이로운 풍경을 눈과 마음에 한껏 담고 사뿐사뿐 최대한 조심하며 서둘러 숲을 빠져나왔어."

복자 할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다, 얘기를 마저 해나갔다.

"그런데 숲에서 나온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내 앞에 서 있는 거야. 두 발만 보고 마을 어른이구나, 혼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을 질끈 감았지. 몇 초 동안 조용한 적막만이 감돌아 눈을 슬며시 떠보았더니 아니 글쎄, 이야기꾼인 거야. 한데 이상한 건 내가 숲에서 나온 걸 알 텐데도 전혀 놀라거나 화내지 않더라고. 그저 말없이 빙긋 미소를 짓고는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갖다 대며 쉿, 하는 몸짓을 취할 뿐이었지. 그때 알았어. 이야기꾼은 숲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구나, 오히려 숲이 너무 아름답다는 걸 나처럼 알고 있구나 하고. 그리고 나중에야 깨달았지. 아마도 이야기꾼은 숲을 사람들로 하여금 지켜내기 위해 그런 전설을 만들어내고 이야기했을 거라는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다 막을 순 없었겠지만 어찌 됐든 그 소문, 전설 덕에 숲을, 숲속 생명들을 지키게 된 거니까."

"그럼 숲에 들어갔던 사내가 죽었다는 것도 아예 지어낸 이야기였을까요?

"그러게, 그건 이야기꾼 본인만 알겠지만... 만약 사내의 죽음이 진짜 사실이었다면..., 옛날엔 워낙 먹을 게 귀했고 항상 굶주리던 시절이니 숲에서 먹을 걸 구하다가 독초나 독버섯 등 먹으면 안 될 것으로 배를 채웠을 수도. 중독돼서 환각이나 환청 등 서서히 병들어가다 죽음에 이르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거지.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생태 환경 보호 등의 이유로 숲은 출입 금지가 되었어. 숲을 지키는 게 그의 꿈이 맞았다면 결국엔 이야기꾼 바람대로 이뤄진 거지."

'전설'이란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주로 구전되며 어떤 공동체의 내력이나 자연물의 유래, 이상한 체험 따위를 소재로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문'이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말을 전하고, 전하여 들리는 말이라는 점은 같은데. 어떤 이는 누군가를 깎아내리기 위해 소문을 만들어냈고 어떤 이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전설을 만들어냈다. 누군가와 무언가는 모두 소중한 생명인데 말이다. 이 사실이 씁쓸해서 슬펐고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잠시 후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을 나서려는 채비를 하길래 물었다.

"어디 가세요?"


"소화 좀 시켰으니 밭에 물 주러 가려고. 숲 근처 옥수수에도 그렇고."


"아, 네... 옥수수요? 숲 근처를 둘러싼 것처럼 보이던 게 옥수수였군요."

차를 타고 지나오면서는 숲쪽 출잎 금지 표지판을 보느라 그랬는지, 반대쪽으로 높게 자라있던 풀이 옥수수인지는 전혀 몰랐었다.

할머니들은 각자 집 근처 조그마한 밭에 각종 채소들을 기른다고 했다. 힘들지 않냐고 이튿날 물었을 때, 물론 고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밭을 일구고 작물을 길러내는 게 참 뿌듯하다고 기정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울적한 데,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고 있으면 삶에 보람과 의욕이 생겨 살아갈 힘이 불끈 솟아난다고 희옥 할머니는 말했다.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우리 나름대로 기를 쓰고 있는 거라며 복자 할머니가 말했다. 그런 할머니들이 대단했고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옥수수는 왜 숲 바로 근처에서 기르시는 거예요?"

가까운 곳을 놔두고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숲 근처에 옥수수를 심은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날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내가 살면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존재였을까, 좋은 일을 한 게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거야. 사느라 바빠서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거든. 시간이 덧없이 흘러 세상을 떠나갈 때는 점점 다가오고 살아갈 날은 점점 줄어드니까 이제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된 거지. 그러다 눈에 저 숲이 들어왔고. 복자 언니한테 들은 얘기도 있어서 바로 근처에 옥수수를 기르면 눈곱만큼이라도 숲을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이 되어주지 않을까, 적어도 그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해서 한 거지. 괜스레. 또 숲에 어떤 움직이는 생명들이 있을진 모르지만 일 년 중 잠깐이라도 그들에게 식량을 줄 수 있으니깐 우리끼리 몇 년 전부터 심기 시작한 거야."
희옥 할머니는 헛헛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고는 곧 포실한 미소가 담긴 표정이 되어 말문을 닫았다.

"이것도 사실 이기심에 우리 좋자고 하는 일이지 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시간이 남아도니까 매일 똑같은 일상을 무의미하게 보내거든. 그런데 저 숲을 위하는 마음으로 옥수수를 기르고 있으면 괜히 뿌듯하고, 좋고, 그러면 맘이 편하고. 결국은 옥수수와 숲 덕분에, 살아가는데 목적이 하나 더 생겼고 우리들 삶의 의미도 또 하나 찾게 된 거지."
기정 할머니가 담담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신기한 게 뭔 줄 알아? 이 마을을 지나쳐 다니는 새들과 솦속 동물들이 먹을 테니 마음껏 먹으라고 잊은 듯이 두고, 남은 게 있을까 느지막이 슬슬 가보면 딱 우리가 먹고 남을 정도의 충분한 양이 꼭 남아있어. 그 부분만 깨끗하게 말이지."
복자 할머니가 신난 표정으로 설명했다.

오늘 나의 할 일을 잠시 미뤄두고 함께 옥수수에 물을 주러 가고 싶어 할머니들을 따라나섰다. 할머니들은 마치 따듯한 상태로 식지 않는 다정한 사람들 같았다.

인간의 안전과 이득을 위해 세운 차가운 철창 대신, 할머니들은 그들의 생이 조금이라도 안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옥수수로 만들어진 따듯한 울타리를 세웠다. 서투르고 어설픈 방식일지라도 성이고 집이자 그들의 전부인 숲이라는 공간만이라도 지켜주고 싶어 하는 그녀들의 마음이 느껴져, 숲속 생명들이 옹기종기 모여 옥수수를 먹고 있을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한마을 아래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 좋았고, 정들어가는 마을에서의 앞으로가 기대되고 설렜다.

우물 안 개구리라며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 좋다고들 하지만, 나의 경우엔 넓은 세상으로 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졌고 좁혀졌다. 오히려 이 마을이라는 작디작은 세상에서 단 며칠을 살았을 뿐인데, 느긋이 시간을 벌며 하루하루를 꼭꼭 씹으면서 보내니 시야가 넓어져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훨씬 살아갈 만하며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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