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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Feb 09. 2019

관계의 화학작용

이론적으로 관계란 상대적인 것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누구는 불편해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는 영 싫은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단기간에 너무나 여실히 체험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평화방송 쪽에서 TV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였다. 라디오라면 모를까 TV카메라 앞에 서는 건 영 자신이 없어서 작가에게 완곡히 사양의 의사를 전했는데 그분은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나를 설득해버렸다. 결국 약현성당에서 야외 촬영부터 하게 되었다. 담당PD와 카메라맨을 그곳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PD는 방송 콘셉트를 설명하며 나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방송용으로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해온 나는 겉보기엔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녹화만 시작하면 금방 긴장하고 얼어붙었다. 기침도 자꾸 났다.  

“편안하게 하세요! 네, 다시 한 번!”

PD는 편안하게 하라는데 나는 자꾸 쫓기는 기분이 들어 수도 없이 NG를 냈다. 나중엔 PD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저는 왜 이럴까요?’ 하소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리 경력이 오랜 PD도 출연자가 갑자기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잘하게 되는 비법은 모르고 있었다. PD는 고개만 갸웃거리며 ‘다른 분들은 잘하시던데……’ 했다.  

   

결국 어찌어찌 촬영을 마쳤고 실내 좌담 촬영이 남았다. 이쪽이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으므로 긴장도도 배가되었다. 작가도 걱정이 되었는지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나를 독려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졌지만 어쨌든 약속했고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를 해야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촬영지로 갔다. 서두르다보니 그날 꼭 먹겠다고 다짐했던 우황청심환 사는 것도 잊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좌담을 진행할 MC인 신귀남 데레사 수녀님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뭔가 마음속에 막혀 있던 것이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뵙는 분이었는데 마치 그전에도 종종 보았던 분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대기하면서부터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카메라 앞으로 자리만 옮겨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야외촬영 때보다 훨씬 많은 카메라와 스태프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나는 수녀님과 대화하는 데 푹 빠졌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내 이야기,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하는 데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야외촬영 때처럼 다시 찍어야 하는 부분도 없었다. 너무 신기한 체험이었다.        


수녀님은 좋은 사람이고 PD는 나쁜 사람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그것이 바로 관계의 화학작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수녀님과 더 주파수가 잘 맞았다. 쉬운 말로 ‘케미’라고 할 수도 있겠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배우들을 볼 때도 종종 느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전혀 안 어울리는데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 전 모 드라마에 섹시당당의 아이콘인 여배우가 출연했고 그녀는 남자 주인공과 격렬한 연애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내 눈엔 둘의 케미가 전혀 없었다. 포옹신도 키스신도 뻣뻣해보였다. 내 주관적인 느낌이긴 했지만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꺼지면 서로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유재석은 박명수를 만나 대성공을 이루었지만 만약 다른 개그맨과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각 개인은 재미있는 연예인이지만 함께 모였을 때엔 케미 대신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건 누구의 실책일까. 글쎄 관계의 화학작용은 직접 부딪치기 전엔 당사자도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제작진을 탓할 수만도 없다.    

 

사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케미는 연인이나 직장 상사다. 연인은 최소한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직장 상사는 선택도 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존경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고 다른 직원들은 모두 그를 따르는데 하필 나만 그가 불편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답은 없다. 견디거나 피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 다만 앞에 언급했던 여배우는 그 울퉁불퉁한 케미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훌륭히 마쳤다. 그 남자배우와의 불화설도 내지 않았다. 존경할 만한 점이다. 우리도 프로라면 프로답게 견디는 수밖에. 대신 다음번엔 좀 더 행운이 있기를 빌어 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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