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 관한 글로 가장 유명한 글이라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유안진 교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시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옥같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대목은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 부분도 포함된다.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 .......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대하는 부분과 두려워하는 부분, 또 친구에게서 실망하거나 상처받게 되는 부분이 여기에 다 녹아 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른 가족은 각자 제 방에 들어가거나 TV 모니터에 매달린다. 하지만 자신은 뭔가 공허해서 누군가와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다. 그럴 때 입은 옷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친구에게 가서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대방도 차 한 잔 함께 마실 친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친구에게서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입가에 밥풀이 묻어 있더라도 웃으며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면 남의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 사람은 좀 그렇지 않니?”
“이런 말을 하던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와 맞지 않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내게 상처를 준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하여 슬쩍 이야기를 흘리며 맞장구를 기대해본다. 상대에게서 ‘어머, 그건 좀 심하지!’,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같은 반응이 나온다. 그러면 내심 안심한다. 기껏 찾아와서 남의 흉이나 보는 사람이라고 경멸당하지 않는 것만으로 너무 위로 받는다. 어느덧 나보다 더 그 사람을 욕하고 있는 친구에게 나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하며 말리기까지 한다.
누구나 꿈꾸는 그런 관계, 하지만 참 아름다운 판타지 같다. 왜냐 하면 이제는 이런 관계가 참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은 대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알게 된 사람들은 트러블 때문에 얼굴을 익힌 경우가 많다. 어쩌다 안면을 튼 사람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연히 마주치면 시선을 피한다. 그저 아는 체 하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만나고 싶고 친하고 싶은 사람은 신기하게도 참 멀리에서 산다. 또 그런 사람은 대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 매력 있는 사람이라서 나에게까지 차례가 잘 돌아오지 않는다. 지란지교를 꿈꾸어 보지만, 현실에서는 힘들다는 것이 현실이다.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이따금 불쑥 튀어나오는 이런 한탄. 이런 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건강하다.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이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 친구에 대한 갈구가 아직 남아 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친구 따위 귀찮아요, 필요없어요’,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태연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전 사람이 싫어요’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럴까,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저럴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하지만 ‘싫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 되돌아올까 두려워 피하게 된다. 당신이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같은 말. 하긴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데 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람의 곁에는 결국 싫어할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나를 비춰볼 거울이 한 개도 없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또 친구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안타깝다.
한 순간 사람이 싫고 미워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때 자신이 왜 그런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정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왜 사람 전체가 싫다는 것인지 마음속에 무엇이 결핍된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쓸데없이 자신을 자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좋은 사람이 주는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외면한 채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아직 때가 아니라서 그럴 수 있다. 또 아직 내 마음이 다 열리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한 오해가 놓여 있어서 서로의 진심이 전달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만이 약이 되는 시기라서 혼자 있는 중이라도 사람에 대해 거부하는 마음은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쉽지는 않지만, 만나게 되면 정말 행복한 그런 관계는 분명히 있다. 그런 관계는 아주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지란지교에 대해서, 작지만 소중한 관계에 대해서 살아 있는 한, 포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