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리 급한가요?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인의 성급함을 표현하는 행동으로 다음의 다섯 가지를 소개했다. 커피자판기에 손 넣고 기다리기,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양치질하기, 웹사이트가 3초 안에 안 열리면 닫기,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닫힘 버튼 계속 누르기, 식당에서 계산할 때 손님이 카드를 주면 주인이 대신 서명하기.
나는 거기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었다. 음식 식기도 전에 입에 넣기, 택배가 이틀 이상, 음식 배달이 한 시간 이상 걸리면 불안해하기, 일행이 있어도 혼자 앞서서 걷기, 약속 시각 3시간 전부터 준비하기,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기….
전형적인 한국인인 나는 결혼 후 한동안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밥을 차려주어도 딴청 하며 빨리 먹지를 않았다. 맛이 없어서 저러나 싶어 서운했고, 한편 답답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그는 그저 뜨거운 음식이 식기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커피든 국이든 입에 바로 넣어 직접 온도를 재야 속이 시원했던 나는 그 기다림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나도 그를 따라 음식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긴 하지만 다른 면에서 성급함을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성급함이 다 나쁜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인의 이런 기질 때문에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성장을 이뤄냈고,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자정이 넘어 도어락이 고장 나도 열쇠수리점에 전화하면 10분도 안 되어 바로 달려와 주고 통신, 인터넷 장애도 대개 내 마음과 비슷한 속도로 처리가 된다. 주변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은 특별히 눈에 거슬리지 않고,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그의 입장이 바로 이해된다.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래. 괜히 부지런해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 나온 정보석 사장은 일을 지시하고 5분 뒤에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캐릭터였지만 그게 밉지 않았다. 눈에 띄고 뭔가 불편한 사람은 반대로 느리고 느긋한 사람이다. 왜 저리 느긋해? 이건 욕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분명히 있음도 사실이다. 빠르게 뭔가를 해낸다는 것은 결국 시간상으로 결과를 빨리 끌어내는 것에 가장 큰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결과의 질이나 과정의 정당성은 간과된다. 시험을 보거나, 숙제를 하거나, 어떤 글을 쓸 때도 나 역시 무조건 빨리 해내는 것에 최우선을 두곤 했었다. 마감이 이틀, 사흘 남았음에도 일단 빨리 해치워야 마음이 편했다. 시간이 남았으면 몇 번 더 검토하고 숙고를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나는 손을 놓았다. 그렇게 서둘러서 남긴 시간을 나는 과연 의미 있게 사용했던 걸까.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 나가면 반드시 보게 되는 것도 있다, 칼치기라고 하던가. 급하게 차선을 변경하며 진로를 방해하고 앞질러 나가는 차들 말이다. 결국 사고를 유발해 경찰이 ‘왜 그렇게 빨리 갔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약속 시각에 늦어서 그랬다’는 변명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저 빨리, 그것도 남들보다 빨리 가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성급함에 중독된 걸까. 그 기저에는 감수성 예민한 민족성에 불안감이 더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우호적이지 않은 여러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데다가 바로 북쪽에는 심심하면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이 있다.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어떤 방해 요소가 생기기 전에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의지가 전 국민의 잠재의식에 DNA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끊임없이 주입받는 경쟁의식도 있다. 과밀한 인구 덕에 주변의 경쟁자보다 앞서가려면 무엇이든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할까. 이런 성급함을 대대손손 물려주는 것이 좋은 것일까.
빠른 결과를 추구하는 성급함은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야 하는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을 홀대하는 풍조를 낳았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당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인문학의 부재로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판단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었다. 시작과 함께 곧바로 결과를 요구하니 시행착오나 실패할 엄두도 못내고 그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허황한 사이비 종교에 놀아나거나 자살을 선택한다. 이런 사회에서 자신만의 주관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마흔을 앞두고 있다면, 이제 스스로 속도를 결정했으면 좋겠다. 성급할 땐 성급하더라도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엔 충분히 시간을 들이겠다는 결정. 숨차게 달리기만 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주변에는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