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강 Jun 18. 2020

비이성

결국엔 이성이 승리해요

 누군가 당신의 SNS에 말도 안 되는 악플을 달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더하기 1이 2라고 당신은 글을 올렸는데, 정말 2인 것이 맞느냐?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느냐?’, 뭐 이런 수준의 글이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화가 나는 대로 ‘이게 무슨 헛소리냐’ 혹은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느냐?’는 댓글로 응수할 수 있다. 아예 악플을 지워버리고, 상대 계정을 차단해버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분은 여전히 나쁘다. 밥맛도 사라지고, 내가 이 SNS를 계속해야 하나 회의가 들 수도 있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99%라고 해도 1%의 이상한 사람이 내 SNS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새 글을 올리기도 두려워진다. 그런데 악플 수준이 아니라 아예 소송까지 걸린다면?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의 사건이 그랬다. 역사학자이자 대학교수인 데보라의 강연에 평소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부정론자로 알려진 데이빗 어빙이 나타나 데보라를 공격한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따진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그녀가 자신을 모욕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그녀를 고소한다. 영화를 보며 나는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끌려간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에 대해 강제성의 증거가 없으니 자기네도 잘못이 없다고 우기고 있는 현실을 떠올렸다. 미쳤구나, 미쳤어. 울화가 치밀었다. 

당사자인 데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여 재판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의 재판을 돕는 변호사들의 태도와 전략이 그녀와 상반되었다. 순간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데보라와 달리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심지어 증언해주겠다며 찾아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그냥 돌려보낸다. 아픈 상처에 또다시 생채기를 낼 필요가 없다며. 어쩌면 희생자들의 고통이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유리한 판결로 다가가는 방법일 수 있었는데 아예 차단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얼음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 자체가 사실 승리를 위한 전략이었다. 

데이빗 어빙을 법정에서 마주했을 때, 그들은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쳐다볼 가치도 없는 물건인 것처럼 그의 억지에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이런 하찮은 의견에 화를 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오직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만 싸운다. 진실은 일부 괴짜들의 헛소리로 훼손되거나 망가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단단하고 차가운 태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멋지게 그들은 승소한다. 

     

흔히 감정이 배제된 사람을 보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를 떠올린다. 감정을 드러내고 쉽게 눈물을 흘려야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눈물이나 억울한 심경을 다 보인다고 모두 선량하거나 약한 사람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에조차 의도가 있는데 성인이 남에게 보이는 눈물에 의도가 없을까. 나는 누군가 쉽게 눈물을 보이면 오히려 정색하게 된다. 참으려고 노력하면 참을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눈물을 보이는 거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해서 이렇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게 된다. 진짜 눈물은 홀로 있을 때 흘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회 안에서 행동할 때에는 최대한 이성을 기반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신뢰받을 수 있는 태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노재팬No Japan’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은 일본의 어이없는 행태에 대해서 그저 그때그때 분노하고 욕하기만 했을 뿐, 실제 생활에서는 일본산 물건을 거부감없이 사용하곤 했다. 특히 유니클로의 히트텍 같은 제품은 마치 겨울철 필수품인 양 구매해왔다. 그런데 이번의 ‘노재팬’ 운동은 좀 다른 것 같다. 감정적으로 분노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아주 차분하게 ‘일본제품? 됐어’ 하는 뉘앙스다. 시작은 감정 때문이었어도 이것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일본제품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는 이성적 판단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개인의 일상에서도 이성의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 SNS에 찾아와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나 당신의 인생을 훼방하는 나르시시스트 같은 인간들처럼, 일상에서 사소하게 부딪치는 여러 관계에 대해 일일이 감정을 담아 대응하는 대신, 차갑게 바라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다. 너무 심심해서 아무나 걸려라, 한판 붙자고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런 것에 사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급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