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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Jun 27. 2020

혐오

함부로 미워할 자격은 아무도 없어요

직장 일이 아닌 외부 일로 여러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던 때의 일이다. 대부분 같은 분야 사람들이었는데 딱 한 남자분만 다른 분야였다. 그는 예술가였고, 훌륭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었고, 행동에도 잘못이 없었다. 굳이 흠을 찾자면 사교적이지 못할 뿐이었다. 잘 웃지 않는 정도, 그리고 농담을 할 줄 몰라 수다스럽게 이야기에 동참하지 않는 정도. 그런데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것을 못마땅해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수다 떨고 농담하는 재능밖에 없었던 주제에 말이다. 누가 먼저 그랬을까. 

“저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

이 말을 듣자 사람들 각자는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모두가 저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그리고 그를 혐오해도 된다고 믿게 되었다. 사람들의 냉소와 비아냥이 점점 노골화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그때 나는 그가 빨리 사라져줘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소설을 읽은 뒤에야 소름이 끼쳤다. 내가 이런 짓을 했었구나.      


소설 속 에드먼드 콰스토프는 키가 크고 조용한 성격을 가진 마흔 살의 세무사였다. 그와  모임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변호사, 저널리스트, 사회학자, 편집자, 박물관 사서, 화가 같은 지성인들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모임이 잡혔다. 아내로부터 이혼당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에드먼드는 새 아내를 그날 모두에게 소개하기로 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에드먼드가 원래 그렇게 따분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안 그래요?”

이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본심을 드러낸다. 사소하게는 그가 담배와 술을 끊은 것에 대해 시기하고, 새 아내가 이혼한 아내보다 못하다고 비웃는다. 에드먼드 부부가 도착한 뒤, 그가 달라진 일상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들의 혐오는 더욱 거세진다. 조금 따분하고, 조금 답답할 뿐인 그를 향해서 말이다. 스스로 특권층임을 자부하면서도 그들은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일에 모두 동참한다. 그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에드먼드가 꺼낸 모든 이야기는 에드먼드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어 돌아온다. 결국 그들은 승리하고 에드먼드는 패배한다. 한 남자가 인생에 닥친 험난한 일을 조용히 헤쳐나간 것이 그들에게는 왜 그리도 못마땅한 일이었을까.     


독일의 저널리스트인 카롤린 엠케는 그녀의 저서 <혐오사회Gegen den Hass>에서 이렇게 밝힌다.  

’증오는 위 또는 아래로, 어쨌든 수직의 시선 축을 따라 움직이며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나 ‘저 아랫것들’을 향한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것을 억압하거나 위협하는 타자라는 범주다. … 타자는 비난하거나 무시해도, 심지어 해치거나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내성적이고 조용하다는 이유로 나아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쉽게 나와 그를 구별하고 혐오한다. 혐오는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잠깐 ’싫어하는 감정‘과 다르다. 항상 이유와 근거가 있고, 체계가 있고 때로 훈련되어 주변으로 전파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세력이 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등록을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입학을 반대한, 여대 동아리 및 각종 단체 측에서는 그녀를 ‘여성의 기회를 빼앗는 남성’으로 인식했다. 그녀의 경우가 희귀한 케이스인 것은 사실이지만 더는 남성이 아닌 그녀를 왜 과거의 성으로 간주하고 거부해야만 했는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도 21세기의 상아탑 안에서 말이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이미 여성 혐오에 근거한 사건들이 발생해왔다고 해도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것은 결코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혐오가 언제나 약한 자, 조용한 자, 방어능력이 없어 보이는 자에게로 향한다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혐오하는 자는 경직되어 있다. 직장에 매여 있던 예전의 나는 자유롭게 자기 안의 평화를 지키고 있던 예술가를 감히 혐오했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속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특권층이라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특권층이 아니면서 행복을 넘본 자를 혐오했다. 나이가 들면 경직성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마흔을 넘기는 순간, 스스로 이런 경직성에 함몰되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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