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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Nov 12. 2018

너무 튀려고 하지 마

어떤 모임에 가든 꼭 보이는 캐릭터가 있다. 나는 이런 게 좋아, 나는 이런 게 싫어, 난 좀 다르게 생각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취향을 먼저 늘어놓고 일일이 까다롭게 구는 사람. 그 사람은 이것이 그저 자신의 개성이 강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세 자매 중 막내로 자랐다. 큰언니와는 여섯 살 차이, 작은 언니와는 두 살 차이가 났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우리 셋은 엄마를 제외하고는 가장 가깝게 지낸 여성 동지였다. 엄마나 아빠에게 야단맞은 후 위로도 해주었고 서로를 지켜보며 장점과 단점을 배우기도 했다. 언니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내 롤 모델이자 반면교사였다. 이런 환경이 본능적으로 내게 영향을 끼친 건 ‘어쨌든 서로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었다. 한 공간에 비슷한 존재가 여럿 있을 필요는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막내인 내가 유난히 예민했다. 특히 두 살 터울인 작은 언니와는 취향이 정말 달랐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언니들과 내가 같아진다면 ‘후발 주자’인 나라는 존재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꼈다.

그런 ‘소멸에 대한 공포’ 같은 의식 때문에 일찍이 누구라도 남의 취향을 따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미술 시간에 어떤 아이가 내가 그린 그림과 비슷하게 그리면 짜증이 났다. 세상에 그릴 게 얼마나 많은데 비슷한 것을 또 굳이 왜? 내가 입은 옷이 예쁘다며 어디 가면 똑같은 것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말엔 경직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여성들의 모임이나 그룹에서는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흔히 ‘따라하기’가 있다. 누군가  뭔가를 제안하거나 소개하면 다른 이들이 그것에 동조하며 따라한다. 같은 화장품을 쓰기도 하고 비슷한 옷을 사기도 하고 같은 책을 돌려보고 같은 영화를 보고……. 그런 것이 내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히 좋아 보이는데도 ‘난 내 개성을 지켜야 해!’하며 다른 선택을 했다.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책들도 누구나 본다는 이유로 제쳐두곤 했다. 글 첫머리에 쓴 ‘난 좀 달라’하는 식의 태도가 내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였던가. 내가 한 모임의 총무라는 것이 되어 뭔가를 주도해야 했을 때였을 것이다. 내가 진행하는 일에 동조는커녕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 개인의 의지를 단체의 결정에 개입시키려는 시도를 겪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참 특출한 개성이 있었고 그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남의 선택에 군소리 없이 따라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한 동조는 인간관계에 있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예전에 그렇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 사람을 통해 보았다. 많이 부끄러웠다.


요즘도 예전의 나 같은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라고 하는 사람, 단톡방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의견이 한 방향으로 조율되었을 즈음 느닷없이 ‘반대’하는 사람, 주최 측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다름’을 위해 ‘다름’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들의 내면이 내겐 그리 낯설지 않다. 그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주장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그 상태에서만 머물러 있으려는 고집에서 자신이 소멸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보인다. 이젠 이런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나기보다 안쓰럽다.      


사실 사람에게 호감을 일으키는 것은 참 쉽다. 그중 가장 간단한 것은 거울효과(Mirroring Effect)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표정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상대가 웃으면 웃고, 상대가 잔을 들면 같이 드는 것. 이런 행동은 보통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소개팅을 할 때 상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그가 내 행동을 따라 하는지 아닌지 살펴보면 된다.

이 ‘따라하기’가 왜 호감을 일으키는 것일까. 아기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인 엄마의 모든 것을 따라하며 세상을 배운다. ‘따라하기’는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앞의 사람과 함께 웃고 같은 타이밍에 차를 홀짝거리고 있으면 둘은 편안한 리듬을 함께 타게 된다. '이 사람이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서로 간에 신뢰가 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은 그와 함께 있었을 때의 느낌을 무의식에 기록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떠난 후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남는 것을 <셰익스피어에게 묻다>의 저자 조지 와인버그는 ‘잔존효과’라고 일컫는다. 함께 있을 때 편안했으면 심장박동이나 호흡이 편안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급격히 피곤해졌을 것이다. 몸이 기억하는 그 ‘잔존효과’가 상대에 대한 평가를 결정짓는다. 그 어떤 매력보다 편안함이 관계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남과 달라야겠다는 고집을 다 버린 건 아니다. 다만 예전과 달리 기꺼이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남과 같은 음료나 식사도 주문하고 다른 사람들의 취향에 따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정말 유익한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는 ‘튀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젠 어디에서든 튀려고 애쓰기보다 고요히 빈 곳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그런다고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님을, 이제 나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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