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나는 인사를 했다. 대학 졸업 후 비디오 프로덕션의 카피라이터로서 첫 출근했을 때였다.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가 나보다 선배였다. 그렇게 인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느껴진 이질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단순히 나이가 달라서는 아니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한 공간에서 처음 만난 것이었다. 이것이 진짜 사회였다. 또래만 바글바글했고 기껏해야 재수, 삼수해서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섞여 있었던 대학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 작은 회사가 디자인, 영업, 총무, 기획 등 다양한 파트로 쪼개져 있었는데 파트 이름처럼 사람들의 인상도 제각각이었다. 그 다양한 사람들 속에 홀로 던져진 나는 설렘과 긴장감으로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내 이름 앞으로 일이 쌓여갔다.
“카피 언제까지 줄 수 있어요?”
“회의 할 테니 빨리 와요.”
“줄거리가 너무 길어요. 더 줄여주세요.”
“신문 스크랩은 매일 하고 있는 거죠?”
회사라는 조직은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저 단독으로 카피라이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기능적 존재’였다.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날에도 내게 주어진 일을 당연하게 요구받았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밤늦도록 비디오를 보아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스트레스를 남자친구에게 토로하면 그는 무조건 내가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는데, 그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 불편했던 것은 디자인 팀의 이런 요구였다.
“요즘 유행하는 카피처럼 쓸 수 없어요?”
예를 들면 TV에 나오는 냉장고 광고 카피나 아이스크림 광고 카피를 패러디해서 우리 회사 제품 카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꼭 이런 말이 따라붙었다.
“전에 일했던 카피라이터는 그런 거 잘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전임 카피라이터는 그들 기준에서 보면 능력 있는 여자였다. 나는 나만의 글, 나만의 창작을 선보이는 게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카피를 카피한 카피’를 원했다. 사실 그것이 내겐 가장 힘들고 서운했던 일이었다.
회사에 들어가면 무조건 1년은 다녀야 경력이 인정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나는 1년을 버티었고 1년이 지난 어느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던 날 갑자기 사표를 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었고, 이후 잘 지내느냐고 묻는 전화도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많은 얼굴들이 하루아침에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나의 첫 직장은 한 동안 실패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첫 직장은 내게 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회초년생에겐 그곳이 참 과분한 곳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선 나는 상업적인 글쓰기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카피는 소설도 에세이도 아니다. 그야말로 팔리는 글이어야 한다. 다른 카피를 표절하는 방식은 좋은 게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를 이해했어야 했다. 어차피 글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였던 주제에 자존심 상했다며 발끈 하는 대신, 주목 받을 수 있는 글을 좀 더 연구했더라면 어땠을까. 또 신문 스크랩은 계속 밀리고 영화 보는 일에도 허덕대던 내가 우수사원 표창을 받았다. 분명히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잘나서 받은 줄 알았다. 이후 다른 직장에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고도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걸 생각하면……. 무엇보다 내가 감사해야 하는 건, 나처럼 비사교적이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있던 인간이 무려 1년이나 근무할 수 있게끔 여러 모로 배려를 받았다는 것이다. 사당역에서 양재동 회사까지 카풀을 해준 동료라든지, 기사용 인터뷰를 위해 외근할 때마다 동행해준 선배라든지……. 너무 자연스러운 배려라서 그때는 고마운 줄도 몰랐다. 정말 몰랐다. 아무도 배려해주지 않는다면 3개월도 버틸 수 없는 것이 직장생활이라는 것을.
누구든지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곳.
강박적으로 떠올라 떼어버리고 싶던 곳.
지극정성으로 다듬고 사랑한 곳.
그리하여 자신과 닮은 꼴이 되어버린 그곳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조앤 디디온
그 이후로도 나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다. 모든 회사가 제각각의 이유로 불완전했다. 나는 훨씬 더 불완전했다. 그럴수록 첫 직장에서의 1년이 불가사의했다. 내 인생 최고로 어설프고 서툴렀을 나.....그런 내가 회사를 견디었던 걸까, 회사가 나를 참아준 걸까. 가끔은 그때의 사람들이 못견디게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