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보면 기나긴 축제와도 같았던 시절이 있다. 5,6년 전 어느 한 시절, 휴대폰에 알람이 뜨면 나는 발딱 일어나 책장을 훑어보며 책을 골라내곤 했다.
“미안하다, 오늘은 너로구나. 너도, 너도…….”
그 책들을 온라인 중고서점에 팔았다. 김애란, 이문열, 무라카미 하루키, 박경철의 책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그 알람은 연극 예매가 가능하다는 알람이었다. 이미 봤던 연극의 티켓을 또 사기 위해 나는 이 훌륭한 책들과의 동행을 포기해야 했다. 사실 이런 책들이어야 가격을 높게 쳐주기도 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그런 와중에 또 한 배우의 광팬이었다.
어느 날 무심코 틀어놓은 TV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었다. 환자들로 아비규환이 된 병원 로비에서 한 의사가 마이크를 잡고 상황을 정리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순간이 참 완벽해 보였다. 배우의 이미지며 목소리, 말투까지……하필이면 부드러운 경상도 사투리였다. 학창시절 존경했던 수학 선생님이 그런 사투리를 구사하셨는데 그 말투가 참 정겨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사투리 억양에 반해 당장 드라마 제목과 배우의 이름을 알아내고 말았다. 드라마 <골든타임>에서의 이성민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드라마에서 조연을 해왔었다. 그럼에도 어색한 서울말 때문이었는지 돋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부터 <골든타임>을 시청하기 시작했고 갤러리에 들락거렸으며 갓 만들어진 팬카페에 가입했다. 드라마가 끝나자 이번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원래 극단 차이무 소속으로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예매를 하고 보니 코너 맥퍼슨의 <The Weir>를 번안한 <거기>라는 작품이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또 더 보았다. 무대가 끝난 뒤엔 극장 밖에 서서 사인을 받고 사진도 찍었다. 새 다이어리를 사서 ‘저 같은 남자 꼭 만나요!’ 라는 멘트를 맨 앞장에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행복한 추억을 쌓을수록 내 책장은 비어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늦가을 그가 모교인 대구과학대에서 특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혼자 대구로 내려갔다. 원래 모교 후배들을 위한 특강이었을 텐데 나 같은 팬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급상승한 인기와 상관없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등장한 배우 이성민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특유의 말투로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자신이 연극영화과 입학을 꿈꾸었지만 난관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다음은 특강에서의 내용이다.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하자 친구는 ‘네가 무슨 연극영화과야?’ 하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선생님도 학교 유사 이래 연극영화과 지원한 애는 네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까지 반대하셔서 대학은 포기했지만 그래도 연기가 하고 싶어서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극단의 단원모집 포스터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을 이성민은 극장에서 숙식을 하며 연극배우로 살았다. 굶기가 일쑤였고 비가 새는 옥탑방에서 젖은 이불을 덮고 자야 했지만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극단에 있는 게 좋고 연기하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었단다.
“(아주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내 인생의 골든타임은 그때(대구에서 연극하던 때) 20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난 오는 비도 못 젖게 할 만큼 뜨거운 놈이었고 추위도 날 못 이겼습니다. 정말 뜨거운 놈이었습니다.”
대구 지역에서 상도 많이 받고 어느 정도 이루었다 싶을 때 그는 서울로 올라온다. 하지만 후배들조차 그를 보고 ‘누구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묻곤 했다. 지명도도 인기도 없었기에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결국 여기저기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이후 매니지먼트가 생기면서 영화, 드라마에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 드라마 <골든타임>을 만난 것이다.
“<골든타임>의 최인혁이 원래는 사투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투리로 연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최인혁 캐릭터에는 제가 대구에서 수련했던 시절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제 원래의 말투로 하니까 편했고 연기가 잘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자신이 잘하는 게 뭔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심사숙고하면서……”
휴대폰에 녹음한 그의 강연을 서울에 온 뒤에도 듣고 또 들었다. 그냥 잘생긴 스타가 아니라 훌륭한 배우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 흐뭇했다. 그리고 ‘저 같은 남자, 꼭 만나요!’라는 그의 메시지가 적힌 다이어리를 쓴 지 1년 만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광팬 생활도 자연스럽게 마감했다. 그러나 얼마 전 그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보니 다시 예전의 기분이 살아났다. 무명에서 단역으로, 단역에서 조연으로, 조연에서 주연으로 어쩜 저리 착실하게 발전할 수 있는지! 사실 연예인에게 갑자기 푹 빠진다는 것은 삶에 약간의 구멍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나도 많이 외롭고 허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덕분에 행복했고 크게 잘못되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았던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역시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