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막글 발행

낙서

by 정하다


흔히들 글은 마음을 꺼내 하얀 종이 위에 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음이 심하게 불안한 날은 단 한 줄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땐 껌뻑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게 되죠.


“불안하면 그 감정을 쓰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듣곤 합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적당히 불안한 게 아니라 몸서리치게 불안할 때는 더더욱요.
키보드 앞에서 한 시간 동안 하아, 하아, 한숨만 써내려간 적도 있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쓸 수 있을 때는 불안감이 조금 걷혔을 때입니다.
아주 조금 불안이 사라진 상태.
딱 그만큼만 씁니다.
내 불안이 들키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나를 감추고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꺼낸다는 건 무척이나 겁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한 줄도 쓰지 못합니다.


그럼 지금 이건 뭐냐고요?

이건 글이 아닙니다.
글을 흉내 내는 낙서입니다.
낙서를 할 때는 그림이든 글이든 상관없으니까요.
그저 하얀 종이든 여백이든 더럽히기만 하면 되니까요.
형식도, 제한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낙서 중입니다.
낙서를 잔뜩 해놓고 발행할 요량입니다.

왜냐고요?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낙서니까요.


혹시 제 낙서를 읽게 되신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 조금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이 미안해하지는 않겠습니다.
살다 보면 흉한 것도 보고 사는 법이니까요.
아차 싶으시다면 얼른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저는 가끔 대단한 작가님의 유려한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이 낙서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몸서리치게 불안했었죠.


그러니 잘 쓴 글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낙서가 될 수도 있고,
잘된 낙서가 어쩌면…
아닙니다. 낙서는 그저 낙서입니다.

논리가 없습니다. 앞뒤도 없습니다.
낙서니까요.


이렇게 대놓고 낙서를 발행하겠다고 떠벌리고 나니
천하무적이 된 기분입니다.
낙서라는 이름표를 붙이니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일종의 자유일까요?


방금 잠깐,
“아무리 낙서라도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는 걸?”
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렸습니다.
낙서는 말이 안 되는 게 당연한 거죠.


말도 안 되고, 글도 안 되니
낙서를 잘하고 있는 걸까요?


글이 아닌 글자들을 뱉으며
하얀 여백을 더럽히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얀 눈밭에 ‘ㅅㅂ’이라고 쓰는 느낌이랄까요?


아무 글자나 게워내니 조금은 후련해지기도 합니다.
입으로 못하던 욕, 손가락으로 하니 시원하기도 하네요.

혹시 끝까지 제 낙서를 읽으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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