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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Jan 26. 2020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다움과 기쁨. 5

나만의 퀘렌시아

        1. 나만의 퀘렌시아


    비 오는 일요일 저녁, 다시 나만의 퀘렌시아 "비밀정원"에서 혼자 놀다.

    투우가 잠시 숨을 고르고 회복하는 투우장 안의 공간을 뜻하는 퀘렌시아는 휴식처, 영혼의 안식처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퀘렌시아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오늘 같은 날 누군가는 선술집이, 누구는 방에 콕 들어박힘이 또 누구는 자전거나 차로 달릴 때 만나는 산과 들이 퀘렌시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한때, 테니스 코트가, 수영장이, 단골 맥줏집이 나의 퀘렌시아였던 적이 있다.  

    꽃을 좋아하는 주인 할머니와 철마다 꽃을 사다 주는 따님이 만들어놓은 비밀정원에서 일요일의 손님은 거의 나뿐이다. 냉커피 한 잔을 시켰는데 그 곱절 가격의 대추차 그리고 수박을 작은 꽃들이 꽂힌 화병과 함께 내어주신다.  이전에 써놓은 원고를 정리하다가, 머리를 식힐 겸 찻집 주변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고 꽃 검색도 해본다. 배롱나무, 칼랑코에 ,일일초, 장미, 금국, 뉴기니아 봉선화, 한련화...... 생소한 이름들도 눈에 띈다.

꽃들이 한창이던 어느날 찻집 입구

    시집 『반달과 길을 가다』에서 시 "비밀정원에서 한때"의 시적 공간이 되어준 곳이다. 시집 발간 후, 어느 봄날에 한 편 더 썼다. 아직 미발표작이다.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올려 본다.

    일요일 저녁이면 모자 쓰고 배낭을 메고 언덕길을 내려가는 남자가 있다. 비봉산 산자락 아래, 한산한 찻집에서 노트북 켜놓고 혼자 노는 인물이 있다. 활짝 꽃이 핀 정원에서 늙은 투우 한 마리처럼 어슬렁거리는 남자가 있다.  그게 나다.    


겨울이 지나서도 그곳에 갔어요.

주말 저녁이면 홀로 앉아 있었지요.

오랜만에 단풍나무는 작은 손바닥을 흔들었어요.

나는 ‘안녕’ 혹은 ‘잘 있었니’란 인사도 없이

잠시 나무 곁에 앉아 있었어요. 

꽁무니에 등을 달고 회전교차로를 

급히 돌아나가는 차들만 바라보았지요.

황홀하던 벚꽃도 사라진 주말 저녁의 찻집.

중년의 남녀가 나누는 밀어密語에도 

화병에 꽂힌 꽃들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

후두염으로 번진 잦은 기침만 하고 있었지요.

    

통념보다도 작은 장미와 카네이션 화분이 놓인 

창문 밖에는 늘 그렇듯 깊고 깊은 어둠이 내리고 

메타세쿼이아가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는 외곽도로에는

미세먼지들이 침묵과 함께 도시를 채우고 있었어요.

책꽂이에 비스듬히 꽂힌 동화 속 이야기와는 달리 

별이 뜨지 않고 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저녁이었어요.

실내에서 겨울을 보낸 관엽식물들은

찻집 입구의 나무계단에 층층이 앉아 있었어요.

지난겨울의 황달기가 가시지 않은 그들은 

나를 아는 것만 같았어요.     


스피커에서는 슬픈 영화 주제곡이

안개비처럼 내리고, 회전교차로 같은 하루를 

도망치듯 달아나 닿은 그곳에서 나는

저 혼자 피고 지는 화초들처럼

또다시 말의 조각들만 매만지고 있었지요.

말의 색깔과 향기가 자꾸만 아득해지데요.

선반에 얹힌 인형人形들의 변함없는 표정과

떨어진 꽃잎들의 시든 얼굴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늦은 저녁에 나는 찻집을 나섰어요.

쥐똥나무들이 제멋대로 자란 언덕을 오르고

꽃은 모두 털어내고 푸른 수의를 입은 벚나무들이 

우두커니 선 길을 가방을 메고 걸어갔어요. 

어수선한 봄날의 저녁을 혼자 놀다가

층층이 불이 켜진, 횟대 같은 아파트로 

꼬리 잘린 수탉의 발걸음으로 떠나갔어요.

낮이 길어져 한참 만에 어둑해진 하늘이 

언덕 아래의 바다처럼 펼쳐지면

어둠 속을 떠도는 작은 목선 같은 반달을 타고 

돌아갔어요.

    -拙詩 『비밀정원의 봄날에』 전문          

    

      2. 혼자만의 시간     


    무료함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지병(持病) 때문에 절제해야 하는 술자리, 지인들도 대다수 음주가 주목적인 모임에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 역시 술 마시는 자리는 대체로 만들지 않았다. 주말은 물론이고 방학이 되면 별다른 소식도 연락도 오지 않는다. 그동안 다니던 운동 동호회, 독서 모임도 탈퇴하고 혼자 놀았다.

    당연히 한가로움이 내 삶의 시공 속을 채우게 되고, 별다른 사건이나 만남이 없는 밋밋한 날들이 일상이 되었다. 한가로움을 넘어선 한산함은 때로는 고독의 감정과 함께 불안과 우울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늙어감의 증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저녁이 되면 으레 테니스 라켓을 메고 가던 테니스 클럽, 여름이면 땀범벅이 되어 동호인들과 어울려 자주 가던 생맥줏집. 그러다 주말이면 테니스 가방 대신 등산배낭으로 바뀐다. 그러면 술도 맥주에서 막걸리로 바뀐다. 그러나 지금은 양상이 바뀌었다. 테니스 배낭이 노트북 배낭으로, 여럿이 어울려 하던 운동에서 저녁이면 찻집에서 혼자 글을 쓰거나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 저녁의 일상이 되었다.

    고독과 한산함에서 머물러 있던 감정이 스스로 여유로움과 자족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독서도 일조를 했다. 모 철학자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한 몇몇 요건 중에서 첫째를 ‘단순함’으로 들고 있다. 그것은 일상의 단순함뿐만 아니라 생각의 단순함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바쁘게 사는 것, 출근부터 퇴근, 게다가 이후의 술자리에서의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빡빡하게 이어진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라 믿어왔다. 나의 의지나 욕망과는 무관하더라도, 그것이 억압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더라도 그렇게 부대끼며 사는 것이 나의 미래를 위하는 것이고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쁘게 사는 것이, 열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이 절대로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늦은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마치 쳇바퀴 돌리듯 바쁘게 살아간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또다시 같은 공간으로 이동하여 같은 일, 비슷한 사건을 겪으며 산다. 직업과 지위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협력하고 소통하고 경쟁하면서 산다. 때로는 자신을 착취하면서까지… 경쟁 사회 속에서 불안과 우울을 겪으면서도 어제와 같거나 비슷한 업무들을 해결하면서 달려왔다. 

현장에서 은퇴한 내 또래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무료함의 고통을 호소한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처음에는 여유였지만 조금 지나면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료함과 한산함을 생산성이 결여된 허송세월쯤으로 여긴다. 아무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자신을 쓸모없는 잉여인간쯤으로 생각하고 사회적 역할을 상실한 자신을 보며 비애를 느낀다. 충분히 이해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을 바꾸어보자. ‘홀로 있음’이 ‘일 없음’이 늘 무의미함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인가? 

    선사들은 “마당을 쓸 때에는 마당 쓰는 일에만 충실하라.”라고 말한다. 그것이 성불하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중생은 “불타는 누구인가?” “깨우침이 무엇인가?”쯤의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화두를 떠올리면서 마당을 쓸 것이다. 그것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마당 쓰는 일에만 충실’할 때 그는 복잡한 번뇌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즉 단순해지는 것이다. 단순해지는 것은 복잡함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얽히고설킨 욕망과 번뇌에서 잠시 일탈하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다. 마음이 산란하고 번잡해지면 몸도 그러해진다. 몸이 긴장하면 신경이 곤두서고 근육도 수축한다. 그러면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기고 오장육부도 제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마음을 이완시키는 것은 몸을 이완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편안해진다.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운다. 그러면 편안해진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터득한 나름대로의 비결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이 아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퀘렌시아 속에서 자아에 대한 인식과 성찰의 시간은 휴식과 안식을 주기도 하고 수행의 시간처럼 깨달음으로 이끌기도 한다. 스님의 참선 수행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비운 시간 모든 긴장을 내려놓은 시간은 우리를 재충전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기 인식의 계기로 이끈다. 

    혼자만의 산책, 사물에 대한 관조, 혼자만의 사유는 때로는 휴식을 떠나 창조의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철학과 예술에서의 위대한 창조, 과학에서의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바쁘게 살려하는 것은 자신을 잊기 위한 방편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일종의 착각이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착취하고 긴장시키며 과도한 소모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바쁜 일상은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며 진정한 자아의 발견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요? 그곳에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즐기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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