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꽃을
베란다 문을 연다. 그곳에는 아내가 아파트 인근에서 주워온 은행, 내가 학교에서 따온 산수유, 지인들이 가져온 감과 햇밤들 그리고 엊그제 시장에서 사 온, 굴비를 만들기 위한 조기 그리고 혜성원에서 선물 받은 국화꽃 화분이 놓여 있다. 빛 고운 가을 햇살에서 더러는 익어가고 더러는 마르고 있다. 바구니에 담긴 감들의 주황색, 마르라고 펴놓은 산수유의 선홍색이 베란다를 환하게 빛나게 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출타 중이고 강의가 없는 오늘, 나는 집에서 쉬고 있다. 멸치와 표고, 무와 파 그리고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동태와 알을 넣어 딸아이가 좋아하는 알탕을 끓인다. 구수한 냄새로 집안이 가득 차고 나는 눅눅해진 집안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베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지난여름 동안 송충이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느티나무는 이제 잎들을 모두 떨구어 편안해 보인다. 양지쪽의 감나무들도 이제 까치 감 몇 개만 아득한 손끝에 매달고 있다. 아침 일찍, 물까치 떼들이 날아와 익은 감을 먹고 가더니 이제는 박새와 오목눈이 몇 마리가 나뭇가지에서 지저귀고 있다.
여름날의 무성했던 잎들을 버리고 나무들은 이제 뿌리에 모든 생명의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 더러는 잠이 들고 더러는 잠이 든 체하며 봄날을 기다릴 것이다. 나의 계절은 가을이다. 이제 버리는 법, 비우는 법을 체득하고 실천할 나이인지도 모른다.
동쪽으로 난 우리 집 베란다에는 아내와 내가 내어다 놓은 화분들로 작은 정원이 차려져 있다. 개수는 많지 않지만 연중으로 늘 꽃이 피어 있다. 동백, 제라늄, 게발선인장. 천리향, 수국, 국화 등이 마치 릴레이 하듯 피고 진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베란다 너머 산 구릉에 피는 벚꽃과 철쭉, 길 언저리의 개나리, 아파트 정원의 목련과 모과꽃 그리고 비봉산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단풍들에만 눈길을 주었었다. 나의 아파트 한 모퉁이에서, 나의 발밑에서 웃으며 말을 건네는 그들의 웃음, 향기를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봄이 오기에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서 봄이 온다.” 최근에 읽은 법정 스님의 글에서 만난 구절이다. 우리는 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생의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기대하고 풍성한 결실이 열리기를 소망하며 산다. 그러나 기다리는 봄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울해지고 비관하고 때로는 절망한다.
“나만의 꽃을 피우면 나의 봄이 온다.”라고 생각을 바꾸면 어떨까? 남들이 모두 피우거나 피우고자 하는 부와 권세와 명예의 부귀 영락富貴榮樂 공명 창달功名暢達의 꽃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 한 송이쯤은 누구나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는 더 높이 날아오르기를 꿈꾸었고, 한때는 물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잠들기를 원했었다. 또 언젠가는 내가 사는 일상을 떠나 눈 덮인 산을 보며 자유로움과 삶의 신비에 감동받기를 원했었다. 자잘한 세속의 시간을 떠나 멀리 여행하기를 꿈꾸었고, 그곳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었다. 그리고 눈 덮인 산,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낯선 땅, 생소한 나무와 풀들의 내음 속에서 그런 감정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유쾌한 여행만 꿈꾸면서 살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의 생 자체가 여행인 것을…
그동안 사소하다고 여겨왔던 것, 당연하게 치부해왔던 것, 비루하다고 생각해왔던 일상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이 아니더라도 색감이 고운 잎새 하나, 길을 비추는 홀로 선 가로등, 지난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 한 자락 모두가 아름답게 핀 꽃들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