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밖에 내어놓은 화분
엊저녁 일찍 잠이 든 탓일까? 오늘은 이른 시간에 잣나무 숲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내가 사는 103동 옆, 관리사무소 건물이 있고 그 곁에는 102동이다. 사무소 건물과 102동의 남향에는 잣나무 열세 그루가 마치 푸른 커튼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아침마다 담배를 피우는 버릇은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잣나무에 깃을 접었던 산비둘기 몇 마리가 잠이 깨었는지 푸드덕댄다. 잣나무 숲 앞에서 일찍 담배를 태우며 나는 하루의 일정을 떠올리기도 하고 가끔은 지난밤의 꿈을 떠올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잣나무들을 바라본 탓일까, 「뜰 앞의 잣나무」란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었다. 조주선사의 공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었다.
눈발이 희끗한 겨울 아침
나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베란다에서 이불을 턴다.
지난밤 흉몽을 연기와 함께 뱉어낼 때
그는 무엇을 털어내고 싶은 것일까.
아파트와 아파트의 경계선에 심겨진 잣나무들
아스라한 꼭대기에 남은 열매들을 두고
청설모들은 어디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겨울 안개에 갇혀있는 소도시의 하루
오늘도 별일 없이 안녕할 것이다.
농협 앞 붕어빵 틀은 여전히 따뜻한 붕어빵들을 토해내고
치킨집 끓는 기름 속에서 닭들은 아우성치고
사거리 김밥집에서는 밥알들이 일렬로 둘둘 말려질 것이다.
저물 무렵 나는 아마도 색 바랜 현수막 같은 말들을
기워대며 또다시 산책에 나설 것이다.
산을 깎고 언덕을 허물며 치솟은
고층 아파트 사이에 갇힌 잣나무들을 볼 때마다
안개처럼 내 발목을 붙드는 이 모호한 생과 인연들.
기억의 한켠에 잔설처럼 자리하고 있는
무지몽매의 회한이여, 무명無明이여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래방의 고함소리
방뇨하고 사라지는 술꾼들
아름다울 것도 바라볼 것도 없는
도시의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하나둘 입을 여는
아파트 베란다의 불빛들
밤이 깊으면 나도 한 마리의 짐승처럼
웅크리고 잠들 테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는 아스라한
사랑, 용서, 감사와 같은 말들
그 거친 껍질 속에 숨어있는 씨앗들
-졸시 「뜰 앞의 잣나무」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마찬가지다. 나는 ‘안개처럼 내 발목을 붙드는 이 모호한 생과 인연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직도 무지몽매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내일도 무명無明 속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을 열망하지만, 흡연하는 버릇 하나 못 버리는 어리석은 ‘나’란 존재는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렇기에 아무리 죽비에 얻어맞더라도 죽을 때까지 ‘사랑, 용서, 감사’와 같은 말의 진정한 뜻을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들을 나는 포기하지 못한다. 이 화두들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걸어야 하는 “사람의 길”인지도 모른다.
102동 1층 어느 호든가, 담배 연기를 극도로 혐오하는 아주머니가 살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잣나무들 앞에 가지 않았다. 내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바람을 타고 번지면 혹 다른 주민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저 멀찍이 비켜서서 잣나무와 청설모, 새들을 바라보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102동 앞에도 작은 꽃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분재로 키우다 옮겨 심은 듯한 키 작은 단풍나무, 느티나무가 심어 있고, 몇몇 꽃 묘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무와 묘목에 물을 주는 남자와 마주쳤다. 관리사무소 화장실에서 물을 길어다 화초마다 일일이 물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는 흰머리와 굽은 허리의 초로의 사내였다. 나는 멀리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 노트북 배낭을 둘러메고 다시 산책을 나섰다. 운동 삼아 다시금 먼 거리를 돌아서 카페로 향했다. 향교를 지나고 명륜동 벽화 거리를 지나서 삼거리로 접어든다. 오래된 집들과 건물들이 늘어선 그곳의 연립주택 1층의 누군가의 베란다 화분 걸이대에 꽃이 핀 제라늄 화분과 몇 개의 화분을 내어놓았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그 집의 내어놓은 화분들이 한창 꽃을 피워 보기 좋았던 때가… 내가 단골로 가는 카페에도 주인이 장미 화분과 일 년 초 꽃을 창가 곁에 내어놓았다. 색색의 장미꽃을 구입하는데 돈 좀 썼노라고 했었다.
십여 년 전, 독일과 오스트리아 골목마다 집마다 내어놓은 화분이 보기 좋았다. 층층마다, 창가마다 놓인 일 년 초 꽃들이 마치 풍요롭고 여유 있는 그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엊그제는 내가 사는 아파트 난간의 화분 걸이대에 화분을 내어놓은 집이 얼마나 있나 눈여겨보았다. 겨우 스무 집에 한두 집 정도다. 그나마 쓰지 않는 빈 화분이거나,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죽어가는 것들이 다수다. 아파트 고층의 경우 낙하사고의 염려가 있다지만 1층과 2층은 그럴 염려도 별로 없는데…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마치 베란다에 화분을 내어놓는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의 주제에 대한 착상이 되면 생각을 보태고 빼고 하면서 구상을 한다. 주제와 관련 없는 번잡한 생각의 가지들은 전지 하고, 논거의 지지대를 세워주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묘목에 물과 거름을 주듯 마음속 한편에 글이란 화분을 두고 지켜보고 매만진다.
그러다 어느 날 한두 송이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면 더 관심을 가지고 보다 세심히 살피듯, 몇 개의 어휘 혹은 몇 구절로부터 글이 시작되면 고심하면서 말의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각의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고통스러운 작업이기도 하고 숨어있던 감정을 자유롭게 발산하는 즐거운 행위이기도 하다.
아직 어설프고 부족하지만 꽃들이 활짝 개화하는 날, 초고가 완성되는 그날은 무엇인가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으로 뿌듯해진다. 초고는 다시금 몇 번의 수정과 보완의 단계를 거치고 나름대로의 자기 검열을 거쳐서 비로소 베란다 밖의 세상인 온라인에 올려지거나 문예지에 게재되기도 한다.
평범한 다수의 작가들의 글쓰기, 꽃을 피워내는 행위와 노동은 재화로 보상받지 못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혹은 인지도가 높은 저자가 아닌 경우, 돈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는다. 국내 대다수의 작가(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은 오히려 자부담으로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 “돈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질문은 “돈이 되지 않는데 화초는 왜 기르는가?”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 베란다 밖을 내어다 보니 아주머니들 몇몇이 아파트 앞 도로 옆에 묘목을 심고 있다. 작년부턴가 공터에서 길러지던 상추, 고추, 파 등이 영산홍, 꽃잔디, 새우란 같은 화초들로 바뀌더니 올해는 더욱 본격적으로 꽃밭으로 변신하고 있다. 동대표를 비롯한 부녀회 아주머니들은 일 년 초 묘목을 심고 물을 길어다 주고 있었다. 고맙다!
오후에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보니 그곳에 팻말 하나가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팻말에 적힌 말들을 주시했다. “꽃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그렇다 나도 공감한다. 즐거운 이유는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고양시킨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의 정신적 고양’ 이것은 글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발밑의 자줏빛 제비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낮게 내려야 하고 구릉에 피어나는 산벚꽃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아야 한다. 가까이와 멀리, 낮게와 높게… 우리의 시선만큼 세상은 보인다. 이 점에서 나는 철학자 최진석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동의한다.(최진석,「내가 도달한 깊이만큼이 나다」, 강신주 외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14.8.)
예술적 충격, 시적 충격을 받을 때 우리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고,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도달한 그 깊이와 높이의 간격만큼이 곧 자기 자신의 함량입니다. 그만큼의 세계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함량을 지탱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힘이며 이 힘은 곧 욕망입니다. 이 힘을 가진 주체, 모든 사건의 주인이 되어 이 힘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존엄한 존재로 새롭게 등장한 나는 존엄한 활동을 하게 되고, 윤리적 힘을 가진 주체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