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열리는 무릉도원의 길
어제가 절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방충망을 열고 만개한 벚꽃들의 표정을 사진으로 훔친다. 그 사이 초대하지도 않은 쉬파리가 방충망이 열리자마자 집안으로 날아든다. 개의치 않고 몇 장 더 사진을 찍는다.
두문불출하고 종일 빈둥거리던 어제 오후.
벚나무들이 마치 미친 듯이 꽃을 피워낸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나무들… 일 년 중 길어야 일주일인 벚꽃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오랜만에 막걸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한다.
벚꽃이 핀 남파로를 거쳐 비봉산 팔각정에 올랐다. 오랜만에 만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동쪽 산 능선 위로 상현달이 흰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만나는 낮달도 반갑고 정겹다. 마치 옅은 분을 바른듯한 황사 끼가 감도는 소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시선을 들어 멀리 첩첩이 겹친 산들의 희미한 윤곽도 바라보다가 향교 쪽으로 하산을 했다.
홍어에다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지만, 평소 탁자가 서너 개밖에 없는 비좁은 홍어집은 코로나로 문 닫은 거리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손님들로 가득하다. 할 수 없이 포차라고 간판이 붙은 집에서 찜닭 작은 것에다 막걸리를 마셨다.
그래도 행복한 오후였다. 활짝 개화한 벚꽃 아래를 거닐고, 산 중턱의 복숭아꽃 자두꽃 산목련꽃을 구경하고 큰오색딱따구리도 만나는 행운이 있었으니… 평소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구는 봄이 오면 ‘꽃그늘 아래에서 막걸리 마시는 것’이 일상의 로망 중 하나라는 나의 말에 공감한다.
벚꽃이 필 때쯤이면 늘 바빴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에 정신을 팔고 산 것일까? 베란다 밖에 꽃들이 저리 아름다운데… 이제야 제대로 본다. 집에 아주 가까이, 나의 발걸음 가까이에도 저들이 있었는데…
오늘 다시 혼자 그 길을 걸어본다. 오후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일렁이는 벚꽃의 물결이 도로를 건너 맞은편 산 중턱까지 이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산골짜기 이곳저곳에도 야생 벚나무가 있었음을 이때쯤이면 알 수 있다. 2020년 4월, 대륙과 대륙, 나라와 나라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서먹해진 이때에도 꽃이 꽃을 부르고 새순이 새순을 일깨운다.
오늘따라 거칠게 부는 봄바람이 꽃물결을 일으킨다. 하얗게 번지는 물결들은 내 사는 아파트 건너편 보도에 가득하고 연인인듯한 젊은 남녀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꽃의 세상은 내가 사는 동네만은 아니다. 한반도 이곳저곳이 꽃의 세상이고 꽃 천지다. 나는 이 짧은 날들을 무릉도원, 도화원, 낙원이라고 이름 붙인다.
당분간 벚꽃들은 마치 흰 파도처럼 출렁일 터이고, 그러다가 흰 눈처럼 내려 도로 위를 하얗게 덮을 것이다. 지나치는 바람이 꽃잎을 자욱하게 날리면 그들은 손 흔들며 이별을 고할 것이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는 날, 나는 꽃들이 연 무릉도원을 홀로 걷는다. 봄꽃이 봄꽃을 불러내듯 내 마음 한 켠에 피어나는 기쁨의 꽃 한 송이 그대에게 건넨다.
따뜻한 남쪽 마을, 사월에 꽃이 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꽃나무 아래 앉아
술 한 병에 잔 두 개.
마침 달이 뜨면 달빛까지 가득 담아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내게 권해주게.
산도 어둠이고 들도 어둠이어서
길은 아득해지고 세상은 막막하더라도
술 한 잔에 담긴 위로와 추억과
달빛만큼의 기쁨이라도 내게 전해주게.
오늘도 지울 수 없는 통증을 견디며
홀로 길을 걸었네.
새하얀 벚꽃들이 늘어선 꽃길을
꿈에서 본듯한 꽃이 핀 마을을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네.
병듦도 삶의 일부인 것을…
겨우내 단단한 주먹을 쥐고 있던
목련도 아름다운 흰 손을 펴 보이듯
용서와 감사를 배울 나이인 것을…
바람결에 우수수 지는 꽃잎처럼
때로는 말없이 헤어지고,
꽃이 진 자리 피어나는 잎새처럼
때로는 다시 만나는 것을…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권하면
별빛처럼 돋아나는 그리움과
문득 옷깃을 파고드는 외로움도
한 뿌리에서 갈라진 꽃가지인 것을…
남쪽 마을에 꽃이 한창인 날
홀로 외롭다 느껴질 때는
꽃이 꽃을 부르고 잎이 잎을 깨우듯
꽃그늘 아래 앉아
내게도 술 한잔 따라주게.
- 拙詩 「사월에 꽃이 피면」 전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