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산으로 산책을 가다
“서 박사 내일 뭘 해? 바쁘지 않다면 내일 서운산이나 가자구!”
카페에서 학생들의 독후감 과제를 평가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잖다. 하필 지갑도 빠뜨리고 온 날인데 술 한잔하잖다.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그는 서운산 등반을 제안했다.
그가 서운산에 가자고 한 것은 올해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일이 있든가, 몸이 안 좋아 핑계를 댔든가, 비가 오든가 해서 올해는 한 번도 하지 않은 산행이었다. 여러 번 거절한 탓도 있고, 치킨과 맥주를 얻어먹는 처지에 딱 거절할 구실도 없어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정 사장과는 오랫동안 서운산을 같이 다녔었다. 바쁘더라도 철쭉이 한창인 봄과 눈이 쌓인 겨울에는 반드시 한 번씩은 산행했다. 그런데 그와 내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뜸해져서 작년 9월 이후로는 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업을 하는 정 사장과는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로, 나와는 동갑이다. 그와는 소백산을 시작으로 정선의 천등산, 경남의 삼천포 등등 여러 곳을 함께 다녔다. 게다가 자칫하면 저승 고갯길도 같이 갈 뻔했다. 나는 오 년 전, 그는 작년에 각각 종양을 떼어냈으니까. 한 몸집하는 그는 말술이어서 소주 예닐곱 병은 기본이었다. 헤비급의 그와 밴텀급의 내가 술을 동등하게 마신다면 그 끝은 뻔하다. 사실, 문제는 그것이다. 등산하다 한잔 한잔 마신 막걸리에 늘 나만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내게 “건강 하자고 산에 가는 것이 아니라, 건강 해치고자 산에 간다.”라고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정 사장이 무슨 문제이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 내 탓이지…
“김치전이라도 부칠까요?”
정 사장과 서운산 간다고 했더니 아내가 말했다. 티셔츠와 수건, 스틱을 배낭에 넣으며 나는 괜찮다고 답한다.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큰일나요!”
아내의 경고성 발언을 뒤로 하고 허겁지겁 집을 나선다. 8시 50분 석남사행 버스를 타야 한다. 정류장 가기 전에 김밥도 두 줄 사고, 막걸리도 한 통 사야 한다.
코로나 때문인지 일요일인데도 등반객은 별로 없다. 시내버스는 마둔 저수지를 지나 종점에 도착하니 9시 20분이다. 우리는 등산화 끈을 묶고 등산 스틱을 꺼내든다. 종점에서 석남사까지는 1차선이었는데, 2차선 확장 공사 중이다. 계곡 옆 곳곳이 파헤쳐지고 있었다.
서운산은 안성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해발 547m의 산으로 천안과 인접해 있다.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되었다는 석남사와 고려시대 창건되어 한때 남사당패가 머물렀었다는 청룡사가 있다. 서운산의 산세는 가족들이 함께 등반해도 될 만큼 비교적 완만하다. 철쭉이 한창인 봄과 단풍철에는 그래도 등반객들로 붐비는 산인데 코로나 때문인가, 아니면 6월 말이라는 시기 탓인가? 한가롭다.
석남사를 지나 정 사장과 나는 쉬엄쉬엄 오른다. 그동안 운동을 제대로 못한 탓인지 벌써 숨이 차고 땀도 난다. 어차피 등반객도 별로 없는 한산한 길인데… 벤치가 있는 곳이면 앉아서 물도 마시고 땀도 닦으면서 천천히 오른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과 헬스를 못하는 내 체력이나 종양을 떼어내고 나서 몸조심하는 정 사장 체력이나 같은 등급이다. 한때 일부러 땀을 빼기 위해 쉬지 않고 오르던 코스였는데… 눈길에서도 별로 어렵지 않은 만만한 언덕길이었는데, 왜 이리 힘이 들고 멀게만 느껴지는지?
단풍나무가 만들어 주는 터널을 지나자 전나무 군락이 이어진다. 유월 말이라서 그런지 꽃들도 별로 보이지 않고 그저 짙은 녹음만이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따가운 햇볕을 나무들이 가려주어서 덥지는 않다. 함께 걷는 동안 나는 정 사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코로나 사태 때문에 확 줄었다는 매출, 며칠 뒤의 임플란트, 고향 땅에 심은 과실수 이야기, 아내와 아들 이야기를 거쳐 손녀 이야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우리가 매번 쉬어가는 벤치가 나온다. 정상을 1/4 정도 남겨둔 평평한 곳에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벤치는 늘 우리의 방앗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땀도 닦고 요기를 한다. 물론 막걸리는 필수이다.
내가 막걸리 한 통과 김밥을 꺼내놓자, 그가 삶은 계란 4개, 방울토마토 그리고 간식 소시지 두 개를 내놓았다. 김밥과 계란의 조합은 마치 어릴 적 소풍날을 연상케 한다. ‘소풍 온 것 같다’고 말하자 ‘이게 소풍이지 소풍이 따로 있나.’하며 그가 응수한다. 그동안 산행하면서 김밥은 내가 막걸리는 그의 담당이었다. 이번에는 막걸리도 내가 준비한다고 우겨서 가져온 한 통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가 적어도 두 통은 짊어지고 왔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 우리의 음주 코스는 벤치에서 막걸리 두 통쯤을 비운 다음 정상주 한 두 사발, 좌성사로 향하다가 다시 한 사발 그리고 청룡사 할머니 집에서 한 주전자쯤이다. 얼큰해져서 시내버스에 올라 졸다가 안성 시내에 내려서 다시 한 주전자의 해산주였으니…
정상에서 각자 인증사진(?)을 찍고 내려오다가 정 사장이 말했다.
“서 박사, 여기는 그냥 지나고 좌성사 가다가 그곳에서 한 사발 하자구!”
그러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서운산 정상에는 이른바 ‘정상주’라고 잔 막걸리를 파는 산상 주점이 있다. 한 주발에 이천 원이니 비싼 셈이다. 안주는 늘 멸치, 마늘쫑, 양파다. 이전에는 늘 그곳에서 한 잔 혹은 두 잔쯤 마시고 내려갔는데, 이제는 체력 좋을 때의 우리가 아니다.
좌성사로 향하는 능선에는 탕흉대가 있다. 탕흉(蕩胸)이라는 말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는 뜻으로 두보의 시 「망악(望嶽)」에서의 "蕩胸生層雲" (탕흉생층운) ‘층층의 구름은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내고’ 에 나오는 말이다. 탕흉대 가는 길 도중에도 막걸리 파는 곳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딱 한 잔씩만 시켰다. 평소에는 주발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이라며 종이컵에 따라준다. 예전처럼 둘은 멸치와 배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막걸리를 마신 뒤 다시금 하산길에 접어든다.
좌성사로 향하는 길은 리기다소나무가 아니라 육송(陸松)이 줄지어 서 있다. 그래선지 오르다가 만난 소나무 길과는 풍취가 다르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비교적 가파른 산길을 따라서 오랜만에 좌성사로 접어든다. 기도사찰로 출발해 백 년이 되었다는 좌성사는 얼마 전까지는 스님의 어머님인 보살이 국수 공양을 해왔었다. 표고버섯과 다시마로 우려낸 육수에 잔치국수를 담고 열무김치를 얹어주던 노보살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양은 솥만이 빈 채로 걸려있다. 여러 번 대접받은 국수에 답하고자 정 사장은 작년엔가 부처님 탄신일에 연등 공양을 했다고 했다. 숲속에 안온히 안긴 산신각을 내려오니 불당 앞 소나무가 의연하다. 예전에도 그가 이곳에 있었던가? 새삼 한눈에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다. 마치 산사 입구의 사천왕인양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붉은 몸집으로 보아서 적송인듯한 그를 정 사장도 사진에 담고 있다.
좌성사에서 청룡사로 향하는 길은 다시 단풍나무 숲이다. 이십여 년 전에 심었다는 단풍이 이제는 제법 자라 그런대로 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다만 청단풍나무 위주로 심어져 가을에는 색감이 덜한 게 아쉽다. 청룡사로 내려오자 다시 날이 뜨거워졌다. 숲 그늘이 사라지고 대신 포장도로 양옆으로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다. 수년 전까지 빠짐없이 들렀던 할머니 집도 이젠 가지 않는다. 보리밥과 청국장이 맛있던 그곳도 할머니가 안 계신 뒤에는 예전의 맛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길재의 시조 구절처럼 서운산은 그대로인데 사람만이 변했다는 허망함이 스며든다.
안성 시내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며 서운산을 바라본다. 구름 아래, 푸른 어깨를 펼치고 앉아있는 품세가 그럴듯하다.
“정 사장! 여기서 보니 그래도 높네!”
내가 말을 꺼내자 그도 손짓을 하며 거든다.
“석남사 쪽에서 정상을 지나 이쪽 좌성사로 내려왔으니 그래도 꽤 온거지!”
평소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린 산행 아닌 산책이었다. 이렇게 정신 말짱하게 귀가하기는 산행 이후 처음이다. 그래도 저승 고갯길 어귀에서 돌아와 산책도 할 수도 있고, 막걸리도 마실 수 있으니 그나마도 행복한 친구들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