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학교 가는 길
유월 중순의 아침나절에 유유히 집을 나선다. 저녁에 동료들과 함께 오 화백의 집에서 만나자 약속한 날이기에 차는 두고 홀가분히 길로 접어든다. 학교까지는 17Km의 거리, 승용차로 20분이면 족하다. 하지만 버스를 이용할 경우 포함하여 적어도 1시간여는 걸린다. 차를 두고 학교에 출근하는 날은 거의 연중행사에 속한다. 차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아내가 데려다 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아내가 일찍 출근하는 날이니 나 혼자 천천히 집을 나선다.
유월의 맑은 날씨, 엊그제부터 30도까지 육박하는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옷차림도 평소와는 다르다. 햇볕을 가리는 모자와 시원한 리넨 셔츠, 청바지에 딸아이가 사준 운동화를 착용하고 여행 때 메고 다니던 배낭도 꾸려서 간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주위를 둘러보면서 길을 간다. 흰 구름이 떠 있지만, 날씨는 화창하다. 햇볕은 밝게 세상을 고루 비추고 있다.
나는 아파트 후문으로 나서서 비교적 한산한 시청 쪽의 길을 선택한다. 후문 앞의 공터에 심어진 꽃들과 쪽 밭의 채소가 눈에 띈다. 아내가 심은 고추와 상추가 며칠 동안의 단비를 머금어선지 푸르다. 한때 흐드러지게 피었던 길가의 벚나무들이 푸른 잎만 무성하게 늘어서 있다.
보도블록이 깔리고 축대로 언덕 모퉁이를 지지하고 있는 길가에는 붉은 넝쿨장미와 금계국이 노랗게 피어있다. 그늘진 풀밭 근처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꽃인지도 모를 것 같은 이름 모르는 작은 꽃들도 보인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보아주지 않아도 꽃을 피우는 그들의 뒤에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물과 햇빛과 바람을 보내주는 그,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그분’을 나는 아직 모른다.
걸어가는 보도블록 위에는 지난 빗속에서 낙과한 후추 알만한 버찌들이 깔려있다. 가끔 운동화 밑에서 부서지며 소리를 낸다. 비켜가고 싶지만 가득 널려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벚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느껴질 즈음, 내가 자주 드나들던 카페 비밀 정원도 지나고 회전교차로 옆에 활달하게 어깨를 편 느티나무도 만난다. 시청 오거리 쪽으로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나의 발걸음은 마치 낯선 외국의 거리를 걷던 그 리듬이다. 오전의 햇볕 때문일까? 행인들은 보이지 않고 차들만 간헐적으로 지나고 있다.
늘 차창 유리 너머로 보던 거리의 풍경, 아직은 시원한 유월의 바람 속에 도시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만 같다. 길 건너 편의점, 후배 시인이기도 한 주인은 출근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벌써 오전 11시, 학교에 도착하면 점심때가 될 것이다. 늘 그저 그런 학교 식당의 메뉴보다 수십 년이 되었다는 밥집의 설렁탕이 나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그래 강의도 없는데 점심이나 먹고 가자!” 혼자 말을 하며 나는 식당의 문을 연다. 손님은 나 혼자다. 아침 식사는 늘 거르면서도 설렁탕 한 그릇 깨끗이 비우지 못한 위대하지(?) 못한 사내가 나다.
380번 버스가 20분 뒤에나 온다고 한다. 인근에 조성된 정자에도 초점을 맞추고 길가에 내어놓은 농원의 해송 분재에도 눈길을 주다가 카드를 꺼내 들고 무작정 기다린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천등산 다릿재 아래의 조그만 산골에 있던 할아버지 댁에서 걸어서 학교까지 등교를 했다. 도시에서 전학을 온 나는 란도셀 책가방을 메고 느티나무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목조 건물의 교실까지 늘 혼자서 걸었다. 친구 없이 걷는 등굣길, 어느 날은 새소리를 듣다가 어느 날은 먼 산의 구름을 따라 걷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무르팍은 성할 날이 없었다. 늘 붉은 머큐로크롬 소독약이 발라져 있었다. 그래도 하굣길에는 고무신으로 작은 물고기도 잡고 메뚜기와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언젠가는 불어난 냇가의 물살 때문에 큰형이 마중 나오기도 했다. 나를 업고 개울을 건넜던 형은 이제 할아버지다. 몇 년 전 뇌졸중으로 아직 투병 중이다.
시내버스는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젊은 학생 한둘 외에는 어르신들만 여럿이다. 다들 마스크를 하고 있다. 창가 곁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짙은 녹음으로 가득한 산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전신주… 시선을 들어 보면 먼 산은 미세먼지에 무채색으로 지워져 있다. 가끔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버스가 몇 정류장을 지나친다. 작은 산 남쪽 능선 아래에는 아담한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다. 이십여 년을 거의 매일 지나치던 길이었지만 운전 때문에 접하지 못했던 풍경들이 낯설다.
나는 학교까지 요금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준 카드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버스는 ‘두둘기’란 이름의 고갯길로 접어들고 있다. 조선조 말,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두들겨 맞으면서 넘었다는 고개다. 내가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뒷좌석의 늙수그레한 사내는 누군가와 통화에 열중한다. ‘판돈이 어떻고…’ ‘아도를 치고…’ 등의 이야기로 볼 때 노름에 관한 통화다. 농사꾼같이 보이는데 누군가와 노름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 같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혼자 상상해본다.
며칠 전 CT를 찍고 나서 의사와 마주 앉았을 때, 내 또래처럼 보이는 그는 내게 말했다.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보세요.”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 우울증 없어요.” 의사는 당황한 듯 “무언가 생산적이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나 취미를 가져보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라며 다소 당황한 모습으로 자신의 발언을 수습하고 있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오히려 의사의 조언이 고맙게 느껴졌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보라!” 사실, 친구들 거의 모두는 현직에서 은퇴했다. 몇몇은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시 구했고, 몇몇은 그저 소일하면서 산다. 2년 반이면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은퇴 후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한 것 없이 글 쓰는 것, 여행하는 것, 기회가 되면 봉사하는 것만을 막연하게 설정해놓은 상태다.
학교에 가까워졌다. 나는 배낭을 다시 멘다. 대학 앞의 정류장에서 내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사 양반이 그냥 앉아 있으란다. 그리고는 버스는 대학의 정문으로 들어선다. “그렇다. 선별적인 등교가 이루어지면서 다시 버스가 대학에까지 들어온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학교 캠퍼스는 한산하다. 실습 교과목 일부는 면대면 수업을 한다지만 실습 강의도 몰아서 한주에 하루 정도만 하기에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본관 입구 쪽으로 들어서자 열 감지 카메라가 경보음을 낸다. 잠시 걷는 동안 햇볕에 따가워진 모자 때문이다. 직원이 다가와 인사하며 내 체온을 재어본다.
연구실이 있는 동으로 걷다가 동료들과 마주쳤다. “교수님 식사하러 가시지요.” “저는 먹고 왔어요. 다녀오세요.” 서너 명의 학생들도 건물에서 나온다. 아마 옆 학과의 학생들 같다. 늦게 시작한 학기라서 이제 12주 차라고 하지만 나는 직접 학생들을 본 적이 없다. 예전 같으면 기말고사 기간일 터이다. 예전 같으면 6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종강을 하고는 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지난 겨울방학에 이어 베트남 종주 여행을 실행하기 위해 항공권 예매와 호텔 예약을 알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름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학기가 마감되는 7월 중순이나 말쯤에 홀로 배낭을 메고 남해 쪽으로나마 훌훌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