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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Jan 18. 2020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다움과 기쁨. 1

 모과

       모과          


    내가 매일 담배를 태우는 아파트 현관 맞은편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다.

    처음 이사 온 7,8년 전에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이지... 아파트 그늘에서 제대로 햇빛도 받지 못하며 낯선 이방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의식하게 된 것은 아마 최근일 것이다. 2층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파트 단지를 조감하던 나의 시야 속에 그가 불쑥 뛰어든 탓에 그 나무를 살펴보게 된 것이리라.

     지난해 가을이든가 나무 가지에는 몇 개의 노란 열매가 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 그것들은 자취도 없었고 조금 지난 뒤에는 굽고 휘어진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있었다.  ㄷ자 형상으로 설계된 아파트의 공터에서 그는 유난히 눈이 많은 한 계절을 나와 함께 보냈다. 나는 그가 보이는 현관 앞 반 평쯤 되는 공간에 재떨이를 내어다 놓고 담배를 피울 때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곤 했다.

    지난봄,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지고 난 뒤 뒷산 나무마다 연초록의 잎새들이 난리를 칠 무렵에 그도 손톱만 한 작은 잎을 슬며시 내밀었다. 그리고는 흰 콩알만 한 꽃봉오리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내가 매일 출근하던 대학 정문의 도로 변마다 벚꽃과 꽃사과가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그도 아파트 응달에서 조그마한 꽃들을 피워 올렸다.

    이제 제법 자란 푸른 잎새 사이에 드문드문 피워낸 모과꽃을 바라보며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흰색의 꽃잎과 연분홍의 꽃심, 마치 흰색 한지에 분홍의 물감을 점점 찍어놓은 듯 피어난 모과꽃들은 어쩌면 어릴 적 친구네 과수원에서 피어난 사과꽃 모양과 흡사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색감은 흰 매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리 지어 활짝 피어나던 그들과는 달리 푸른 잎새 사이에서 부끄럽다는 듯이 드문드문 미소 짓는 모과꽃의 이미지는 묘한 심정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열이 오른 네 살배기 딸아이의 발그레한 볼 같기도 하고, 연인을 기다리다가 반가움과 부끄러움에 붉어진 처녀의 뺨 같기도 하다. 또다시 바라보면 그것은 강물 위를 떠내려가던 불배의 불빛 같기도 하고, 오월에 산사山寺마다 걸어놓은 연등燃燈같기도 하다. 어느 날 나는 노트 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이사이로 모과꽃 피어납니다.

연초록 잎새 곁 

연분홍 꽃잎들이 눈을 뜹니다.     

내려다보면 물감을 점점點點 찍은 듯

올려다보면 촛불을 달아 놓은 듯

그늘 속에서도 모과꽃 피어납니다.     

알레르기로 발그레해진 딸아이의 볼처럼

물 따라 흐르다 하나 둘 꺼지는 불배들처럼 

모과꽃 피었다집니다.     

뒷산 앞산 보이지 않는 황사 자욱한 봄날.

연지 같기도 하고 곤지 같기도 한 꽃잎들이

관음觀音처럼 살풋 웃음 지으며... 

             - 拙作 「모과꽃」 전문


    꽃이 지고 난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인가. 모과나무 잎새 사이사이에 푸릇한 열매들이 맺혀있음을 보았다. 타원형의 모과 잎새 뒤에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열매를 하나 둘 세어보았건만 매번 열을 넘지 못했다. 아마 더 많은 푸른 모과들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점점 서늘해지는 바람결 속에서도 모과들은 날이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어른 주먹 크기만큼 자라나 이젠 제법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가을 어느 날, 나는 다섯 개의 푸른 모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바라보니 아뿔싸! 비교적 낮은 곳에 매달려 있던 열 매 한 개가 사라지고 없었다. 가지까지 꺾인 것을 보니 누군가 아직 덜 익은 모과 한 개를 따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개는 위층에서 내던진 투척물에 맞아 생긴 흠이 서너 줄 선명하다.  네 개의 모과는 그런대로 가지에서 잘 버티어주었고 이젠 녹색에서 옅은 노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현관 앞에서 바라볼 때면 은은하게 모과 향이 번져가는 듯도 했다. 

    그런 어느 날 아파트 도색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져 내가 사는 103동도 페인트칠을 다시 했다. 수성페인트가 발라진 아파트는 말끔하게 달라져 있었지만 모과나무는 잔뜩 페인트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리고 모과들은 누군가가 따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초겨울로 접어들던 어느 날, 가지가  꺾인 모과나무 한 그루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내 연구실에는 지금 모과 두 개가 진노랑으로 익어있다. 죽산 읍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과일점에서 3개에 이천 원하는 모과 세 개를 사서 하나는 차 안에, 두 개는 연구실 서재 위에 올려 놓아두었었다. 출근하여 연구실 문을 열면 신선한 모과 향기가 먼저 나를 반긴다. 사 온 지 벌써 서너 달이 지났음에도 썩지 않고 맑은 향기로 반겨주는 그들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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