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을 바라보며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수국의 분갈이를 했다. 지난 유월, 꽃이 지고 나서 분갈이를 한 뒤 세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을 한 것이다.
일요일 잠시 낮잠을 즐기다가 문득 ‘분갈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모종삽과 세숫대야를 들고 아파트 건너편 텃밭에서 고운 모래가 많은 흙을 떠다가 화원에서 사 왔던 배합토와 섞어서 기존의 흙들은 많이 털어내고 새롭게 채워 주웠다. 이번의 시도마저 실패한다면 내년에는 꽃을 볼 기대를 단념해야 할 것이다.
“죽으면 고만이지 뭘 그래요!”
아내가 수국에 집착하는 나의 모습이 안 되어 보였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키우려면 제대로 된 예쁜 화분에 심어주든지, 이것저것 아무 데나 심고……”
‘꽃만 예쁘면 됐지, 화분이 무슨 상관이람…’ 혼잣말로 대꾸해보지만 사실 아내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아파트 공터에 누군가 내다 버린 빈 화분을 얻어다 하나둘 심어놓은 것은 사실이다.
지난 사월, 복지시설 혜성원의 이 원장님이 행사에 초대한 일이 있었다. 행사를 끝내고 귀가할 무렵, 시설의 건물 입구에 놓인 백여 개도 넘을 것 같은 수국 화분을 맞닥뜨렸다. 흰색, 분홍, 파랑, 보라 등 갖가지 색깔과 꽃 모양새의 수국들이 참 예뻤다.
“직접 키우신 것들인가요? 참 예쁘네요!”
나의 물음에 이 원장님은 화훼농원에서 기증한 것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심을 곳이 없어서 우선 보관 중인 것이니 얼마든지 골라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흰색과 분홍색의 꽃이 피어있는 두 개의 화분을 골랐다.
“교수님 더 가져가세요.”
시설에 재직하고 있는 제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는 거들었다. 그리고 파란색, 보라색, 무늬가 있는 꽃이 피어있는 화분 네 개를 더 골라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베란다에 일렬로 세워두고는 물을 흠뻑 주었다.
꽃들은 근 한 달을 버티며 피어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수국들은 말라가는 형상이었다. 나는 화원에서 배합토와 거름을 사다가 분갈이를 해주었다. 머그컵보다 조금 더 큰 플라스틱 화분 안은 뿌리가 가득했다. 집에 있던 두어 개의 화분에다 누군가 내어놓은 국그릇보다 조금 더 높은 화분 서너 개를 가져와 기존 뿌리의 흙은 털어내지 않고 정성껏 심어주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수국은 물을 좋아하고 거름도 좋아하니 물과 거름을 자주 주라고 한다.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주한 그들을 위해 나는 매일 아침 흠뻑 물을 주었다. 그리고 화원에서 사 온 팥알 크기의 거름들도 뿌려주었다. 그러나 몇 주를 견디지 못하고 화분 두 개는 꽃을 피운 뒤, 점차 시들어가더니 완전히 말라죽었다. 나는 아침과 저녁으로 물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화원에서 사 온, 물에 타서 주는 영양제도 시비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상태는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가지에서 새순들이 돋아나 오다 다시 누렇게 말라죽는 것이 다반사다. 그래도 화분 네 개는 죽지 않고 작은 잎들이나마 내밀어 주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작은 뜰에 꽃나무들과 화초들을 심고는 했다. 살구와 앵두나무 아래 백일홍과 수국과 채송화들이 봄이 되면 꽃을 피웠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물끄러미 그것들은 바라보곤 했다. 올해 유월과 칠월, 어릴 때처럼 나는 베란다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수국들을 눈여겨보곤 했다. 그것들이 잎들과 가지를 틔워놓으면 마음속에서도 기쁨 한 잎이 피어나는 듯했다.
아내도 베란다에 있는 화초 중에 유난히 수국만을 예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물을 줄 때면 다른 것들까지 흠뻑 물을 주고는 했다. 아내는 내게 “수국에만 물을 주고 다른 것들에는 주지 마세요. 당신이 너무 자주 물을 줘 제라늄은 뿌리가 썩었어요!”라고 말했다. 언젠가는 수국들이 내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나는 마음속에 받아 적었다. 그것은 한 편의 시가 되었다.
희고 푸르던 꽃들이 지자
마른 가지들 겨드랑이마다
천사의 날개 같은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한 줌의 물을 받아 마시고
한나절의 햇빛과 무더운 바람 속에서
그들은 다시 그리움을 키워가고 있었다.
잎 위에 새잎을 올리고
잎새들은 가지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올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면
수국의 뿌리는 꽃대궁을 밀어 올릴 것이다.
흙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뿌리들에게
나는 팥알보다도 작은 거름 한 줌을 뿌려주었다.
지난 사월이었던가.
한 뼘만큼의 수국 화분을 들여다 놓은 것이,
색깔과 모양과 무늬가 서로 다른 여섯 개의 작은 화분
둘은 꽃만 피운 뒤 말라 죽고 넷은 아직 살아 있는데…
아침마다 베란다에 앉아 아이처럼 그것들을 지켜본다.
사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란 이야기에
고개를 끄떡이며 폭염의 창밖을 무료하게 바라본다.
우리들 삶의 뿌리는 사랑이라 했던가.
우리는 사랑으로써 산다고 했던가.
잎들이 가지를 밀어 올리고
가지마다 꽃이 피는 저 수국들이
내게 말하고 있다.
그리움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고
기다림이 없으면 사랑도 피어나지 않는다고
무더운 여름날 아침에 작디작은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하고 있다.
-拙詩 『수국水菊을 보며』 전문
지난여름 아내와 함께 베트남 달랏을 여행하였을 때 길옆에 가득 수국이 심겨 있었다. 그것들은 내 키만큼 컸으며 간헐적으로 솜사탕만 한 희고 푸른 꽃송이들도 달려 있었다. 흙을 보니 모래가 섞인 황토였고 거름도 뿌려져 있었다.
나는 화분을 들여다 놓고 인터넷에서 수국을 검색한 적이 있다. 물 水가 이름에 들어있는 것처럼 물을 좋아하고 거름도 자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꽃은 처음에는 흰색이지만 다시 청색과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아울러 흙이 알칼리이면 청색, 산성이면 붉은색 꽃이 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냉정, 무정, 변심과 같은 꽃말이 붙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꽃말과 다른 점도 많은 것 같다. 그들은 홀로 피지 않는다. 수십 송이 이상이 마치 구름송이처럼 함께 피어난다. 꽃송이들도 여타 꽃들과는 달리 오랫동안 개화를 지속한다. 이렇게 오래가는 꽃송이는 백일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배롱나무꽃 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포기나누기나 꺾꽂이를 해주어도 잘 자라는 강인함… 꽃 모양이 섬세하지도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지만 여럿이서 이루어내는 조화로움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피워내는 꽃에게 냉정함이나 변심과 같은 꽃말을 붙인다는 것은 다소 피상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수국을 키우면서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물과 거름도 충분히 주었고 정원의 배합토에다 분갈이를 해주었으며 반그늘 속에서 놓아두었는데 그런데도 베란다의 그놈들은 자꾸 죽거나 마르기만 하니…… 혼자 쭈그리고 앉아서 그것들을 보고 ‘아마 품종이 다른 것일 거야.’ ‘화훼농장에서 비료와 약제로 꽃 피운 것일 거야.’ ‘혹 가끔 보이는 민달팽이 때문은 아닐까?’ ‘물을 너무 자주 줘서 이것들이 안일해져서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 등등의 나만의 추측을 해보기도 했다.
어머님이 화분에서 키운 수국들도 커다란 상추만 한 잎들에다가 어른 주먹만 한 꽃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고 내가 가끔 들르는 찻집 정원에도 수국이 커다란 배추처럼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얘들은 왜? 결국 내가 추론한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흙에 문제가 있다는 것 또 하나는 내가 물을 너무 많이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래가 섞인 일반 흙과 배합토를 반반씩 섞어 분갈이를 하고 뿌리가 호흡할 만큼 기다렸다 물을 주자는 것이다. 그래도 시들어버린다면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분갈이를 해주고 베란다를 깨끗하게 청소를 했다. 베란다에 내어놓은 20년이 넘은 관음죽을 비롯해 느티나무 단풍나무 천리향 치자나무 선인장 동백들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 같다. 몇몇은 희고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고 동백도 내년을 준비하는지 가지 끝에 둥근 봉오리가 맺혔다. 그런데도 작은 수국만 지켜보는 내가 그들은 언짢을지도 모른다. 늘 딸 바보인 나를 못마땅해하는 아내와 아들들의 시선처럼…
지금 집에는 두 개의 수국 화분만이 놓여있다. 꽃이 피었던 대궁은 잘린 채 마치 목만 남은 형상이다. 초겨울에 접어들자 그들은 모든 잎을 버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동면하고 있다. 그들 곁에는 늦가을에 선물 받은 작은 국화 화분 셋이 놓여있다. 국화들도 수국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듯 꽃을 피워냈다가 이제는 마르고 있다. 겨울로 접어든 우리 집 베란다에는 내가 작은 화분들에게만 정성을 쏟을 때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내가 키우는 동백과 천리향, 제라늄이 꽃봉오리를 키워가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그들은 실내에서 꽃을 틔우고 향기를 품어 낼 것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던 두어 달 전, 나는 두 개의 수국 화분을 내 연구실로 옮겨다 놓았다. 온실에서만 자라온 그들이 차가워지는 바람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연구실에 홀로 있던 소나무 분재 옆에 두고서 간간이 분무기로 물도 뿌려주었다. 비교적 온화한 공기 탓인가, 반달쯤 지나서 작은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잎들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화분 하나는 말라죽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대궁의 수국 화분에도 늘 같이 물을 주고 있다. 어쩌면 뿌리는 살아 있는지 모른다고… 봄이 오면 잎을 틔워낼지 모른다고 부질없는 기대를 하면서…
내가 기대했던 연구실의 수국 화분 두 개는 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연구실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 말라죽은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베란다에 무심히 놓아두었던 화분 두 개는 3월이 되자 손톱만 한 작은 잎들을 내밀었다. 이제는 조금 더 자라 티스푼 같은 잎을 여럿 달고 있다. 몇 안 되는 이파리를 중 두어 개는 민달팽이가 갉아먹은 흔적도 지니고 있다.
겨우내 나는 수국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남다르게 정성을 쏟지도 않았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 그들도 천리향이나 동백과 똑같이 대우받고 견디었다. 2월 초 천리향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베란다 가득 뿜어주었고 2월 말에는 동백꽃이 다른 해보다 더 큰 붉은 꽃송이를 여럿 보여주었다. 아내는 상이라며 쌀뜨물을 그들에게 듬뿍 주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천리향과 동백을 꽃피우고 수국의 새싹을 틔워낸 것은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꽃을 피우고 잎을 틔워낸 것은 하늘과 구름, 햇빛과 달빛, 바람 속에 숨어있는 그분, 그들의 생명 속에 깃든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손길이라는 것을…
아직 내 연구실에는 마른 대궁만 남아 있는 수국 화분 두 개가 있다. 그 옆 해송 분재는 봄이 되자 푸른 바늘 같은 새잎들을 펼쳐 보이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러나 출근하면 나는 늘 그들에게도 물을 준다. 어쩌면 그들도 잠을 깨면 내게 푸른 잎을 보일는지 모른다고 여기면서… 아마 한 달은 더, 물을 주고 기다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