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상 May 27. 2020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그리고 그 예쁜 누나 옆에 있는 멋진 동생에 관한 이야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혹은 밥 잘 사주는 멋진 언니가 되려면 뭐가 필요할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돈과 시간이다. 누군가와 식사 약속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여유와, 2인분의 식사를 계산할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여유. 하지만 이 둘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으니, 바로 밥을 사줄 대상이다. 밥을 사 줄 대상이 없으면 그저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이 되는데 그칠 테니 말이다.

즉, 밥 잘 얻어먹는 예쁜/멋진 동생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밥 잘 사주는 멋진 선배들의 옆에는 밥 잘 얻어먹는 멋진 동생들이 있다. 그런데 ‘멋진 선배’에 비해 이 ‘멋진 동생’들의 멋짐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밥을 사 주는 쪽보단 밥을 얻어먹는 쪽이 훨씬 더 어려운데 말이다. 우선은 말을 꺼내는 것부터도 “밥 사줄게!”보다 “밥 사주세요!”가 훨씬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선 짧은 시간 내에 ‘선배와 나의 친밀도를 고려했을 때 갈만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는 식당에서 판매하는, 내가 먹고 싶으면서 이 선배도 먹고 싶은 것, 그러면서도 선배한테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을 메뉴’가 무엇일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아, 그리고 ‘적어도 나는 이 사람에게 내가 밥을 사달라고 했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은 귀엽다(?)’라는 모종의 자신감도 갖고 있어야 한다.     

사실 후배는 그 자체만으로 귀여운 존재다. 세상의 모든 후배들이여, 자신감을 가지자.

새내기 이름표를 떼고 막 선배가 되었던 어느 해의 봄, 나는 캘린더를 빼곡히 밥 으로 채웠었다. 새내기가 되는 것만큼이나 선배가 되는 것도 들뜨고 설레는 일이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내 통장 잔고는 그 캘린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엔 동생한테 이런 카톡을 보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생, 누나 후배들 밥 사주느라 요즘 맨날 삼각김밥만 먹어....그니까 네가 엄마아빠한테 누나 특별 용돈 좀 쏘라고 잘 흘려봐.”

약속땐 이렇게 근사한 메뉴를, 집에 돌아와선 삼각김밥

돌이켜보니 멋진 선배가 되고 싶었던 그 노력이 참 불쌍하고 귀엽다. 동시에 내가 참 복 받은 사람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내가 밥 잘 사주는 멋진 선배(적어도 나의 재정적 궁핍함을 들키지는 않았으므로)가 될 수 있었던 건, 내 곁에 밥 잘 얻어먹는 멋진 동생들이 있었던 덕분이니까. 적어도 그들이 저 귀찮스럽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과정을 거칠 만큼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 줬다는 뜻일테니까 말이다. 밥을 먹고 나오면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받는 쪽은 항상 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참 고마울 일이었다. 아마 그때의 나도 어렴풋이 그걸 느끼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삼각김밥을 먹으면서도 즐거웠겠지.(으이구!)     


앞으로도 나는 밥 잘 살 줄 아는, 그리고 밥 잘 얻어먹을 줄도 아는 멋진 사람이고 싶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에게 ‘밥 사주세요!’라고 애교 섞인 말을 건네며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내게 밥을 잘 얻어먹을 수 있는 멋진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을 만큼의 인복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밥을 살 때, 남은 생활비를 계산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능력은 갖춘 사람이고 싶다.

자, 또 감사할 이유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하나 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