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살던 당시의 상식적인 세계관을 파악해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목적인 '해탈'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세계관 그리고 불교와 99%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자이나교의 핵심 이론,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점 순으로 이해하는 것이 빠릅니다.
베다 시대 초기에 까르마는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주로 제사 의례와 관련된 개념이었습니다. '행위'를 뜻하는 까르마는 처음에는 '제사 행위'만을 지칭했습니다. 당시 제사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졌으며, 올바른 제사 행위를 통해 신들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제사의 정확한 수행이 원하는 결과를 보장한다고 보았습니다.
브라흐마나 문헌(베다에서 우파니샤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까르마 개념은 중요한 변화를 겪습니다. 제사의 효과가 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관념이 발전했습니다. 이제 신의 의지보다는 제사 자체의 힘이 더 강조되었고, 정확한 의례 수행이 필연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확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까르마 개념은 철학적으로 더욱 심화됩니다. 까르마의 의미가 제사 의례를 넘어 모든 행위로 확장되었고, 행위와 그 결과의 필연적 연관성이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까르마가 윤회 개념과 결합하여 생사의 순환을 설명하는 핵심 원리로 발전했으며, 행위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베다 전통의 까르마 개념을 바탕으로, 불교와 자이나교는 각자 독특한 해석을 발전시켰습니다.
자이나교는 까르마를 매우 물질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까르마를 영혼에 달라붙는 실제 물질로 보았으며, 이 물질적 까르마가 영혼을 속박하여 윤회하게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해탈을 위해서는 극단적인 금욕과 고행을 통해 이 물질적 까르마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불교는 까르마를 인과의 법칙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영원한 실체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까르마를 행위와 그 결과의 자연스러운 연결로 보았습니다. 특히 의도(cetanā)를 까르마의 핵심 요소로 보아, 단순한 행위보다는 그 행위의 의도와 동기를 중시했습니다. 불교는 까르마를 숙명론적으로 보지 않고, 현재의 의식적 선택과 행동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자이나교는 마하비라(기원전 599-527년경)가 창시한 종교로, 붓다와 동시대의 사상가였습니다. 자이나교는 세계를 '지바'(생명/영혼)와 '아지바'(비생명)로 구분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영원한 영혼(지바)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이 영혼이 업(karma)에 의해 물질에 속박되어 윤회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이나교에서 업(까르마)은 매우 물질적으로 이해됩니다. 업은 지바에 달라붙는 미세한 입자로 여겨지며, 이 업의 무게로 인해 영혼이 윤회하게 된다고 봅니다. 지바(영혼)가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가지않는 한, 인간의 육체이든 식물의 형태이든 물리적 형태에 구속되어 윤회를 계속하면서 속박에 묶여 있게 되는 것이죠. 지바가 미세입자인 까르마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초월적인 능력을 갖는 존재자가 되며 앎의 능력을 구속받지 않게 되어 전지자(사르바냐)가 됩니다.
까르마는 크게 세가지 방식, 행동, 말 그리고 생각으로 쌓이게 됩니다. 생각으로 얻는 까르마까지 고려하면 까르마를 모으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특히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쉬라마나 전통들은 일반적으로 일상의 사회생활을 포기 혹은 중단하고 출가수행자로서의 삶을 택하는 것 외에 답이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됩니다.
자이나교는 해탈을 위한 세 가지 보석(triratna)을 제시합니다:
- 바른 믿음: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 바른 지식: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
- 바른 행위: 엄격한 계율과 불살생의 실천
특히 자이나교는 불살생(아힘사)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모든 폭력과 살생을 철저히 금지합니다.
자이나교에서 해탈은 영혼이 모든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탈한 영혼은 우주의 정상에 머물며 영원한 지복을 누린다고 설명합니다.
자이나교의 이러한 세계관은 당시 인도의 전형적인 종교적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영원한 영혼의 존재, 업의 물질성, 엄격한 계율과 고행을 통한 해탈 등은 불교가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관념들이었습니다.
붓다는 당시 인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윤회와 까르마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붓다의 가장 큰 혁신은 영원한 실체나 불변하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윤회와 까르마의 작용을 설명해낸 것입니다.
붓다는 영원한 영혼(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대신 윤회를 연기법(緣起法)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며, 이전 순간의 의식이 다음 순간의 의식을 조건 짓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이 옮겨가듯이, 이전 생의 의식의 흐름이 다음 생의 의식을 조건 짓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붓다는 까르마를 의도적 행위(cetanā)로 정의했습니다. 단순한 행위가 아닌, 그 행위의 의도와 동기를 까르마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까르마 개념을 재해석했습니다.
1. 의도의 중요성: 행위의 외적 형태보다 내적 동기를 중시했습니다. 같은 행위라도 그 의도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습니다.
2. 결정론의 거부: 까르마를 숙명론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현재의 의식적 선택과 행동을 통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3. 실천적 관점: 까르마를 형이상학적 논쟁거리가 아닌, 실천적 윤리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현재의 행위와 그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습니다.
붓다는 까르마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무명(無明)을 깨치고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붓다의 이러한 해석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실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책임과 변화의 가능성을 설명해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정론도 아니고 허무주의도 아닌, 중도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해탈의 목적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수행자들이 세속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 생의 고통이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믿고 있다면 이번 생을 열심히 살아서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것(부자가 되거나, 혁명을 하거나...)보다 해탈을 통해 윤회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결정이 더 높은 ROI룰 보장하죠. 하지만 윤회를 믿지 않는다면 혹은 기독교의 수행자들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길고 힘든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붓다는 윤회를 믿었을까요?
초기 경전에서 붓다는 분명히 윤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전생들을 보았다는 내용(숙명통)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당시 청중을 위한 교육적 방편으로 볼지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는 "내가 가르치지 않은 것은 가르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들이 고통의 소멸과 직접적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윤회의 존재 여부 자체보다는, 현재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가장 큰 논쟁점은 붓다의 무아설과 윤회 개념의 양립 가능성입니다. 영원한 자아가 없다면, 무엇이 윤회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붓다는 이에 대해 연기설로 설명했습니다. 즉, 영원한 실체는 없지만 조건에 따른 현상의 연속은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1. 붓다는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윤회를 인정했다는 견해
2. 윤회를 비유적, 심리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견해
3. 붓다가 윤회 자체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했다는 견해
결론적으로, 붓다가 윤회의 존재를 '믿었는지' 여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붓다는 윤회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했으며, 이를 통해 고통의 소멸이라는 실천적 목적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타마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의 해탈 경험을 제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하룻밤 동안 세 단계에 걸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는 '삼명(三明)'이라 불리는 세 가지 통찰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명(宿命明)에서 붓다는 자신의 모든 전생을 보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세계와 시간을 거치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모두 꿰뚫어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윤회의 실재성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두 번째 명(天眼明)에서는 모든 중생들의 업과 그 결과를 관찰했습니다. 중생들이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윤회하는지를 분명히 보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업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명(漏盡明)에서 붓다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고통의 원인과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완전히 깨달았으며, 이것이 후에 사성제(四聖諦)로 정리되었습니다. 또한 모든 현상의 상호 연관성을 깊이 통찰하여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진리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붓다는 완전한 해탈에 도달한 후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의 깊이와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이 진리는 깊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고요하고 수승하며, 논리적 사유를 뛰어넘고, 미묘하여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영원불변하는 자아(atman)가 없다고 하면서도 윤회를 설명합니다. 이는 매우 독특한 철학적 입장으로, 붓다는 이를 연기설로 설명했습니다.
불교는 이를 "불꽃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한 촛불에서 다른 촛불로 불이 옮겨 붙을 때, 옮겨진 불꽃은 이전 불꽃과 동일하지도 않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의 전이는 인과적 연속성을 가지되, 영원한 실체의 이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봅니다. 우리의 의식도 매 순간 이전 순간의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생겨납니다. 죽음과 재생도 이러한 의식의 연속된 흐름의 한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업(karma)도 이러한 맥락에서 재해석됩니다. 업은 어떤 실체가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조건으로 작용하여 다음 순간의 경험을 형성합니다. 마치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결과를 조건 짓는 것처럼, 이생의 행위가 다음 생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해석은 철학적으로 매우 정교하며,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윤리적 책임과 해탈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영원한 실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상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중도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가설은, <붓다는 당시의 종교적 믿음을 공유하며 성장하였고 성인이 되어 그 믿음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오랜 기간의 사유를 통해 그 믿음이 완전 구라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너네가 믿는 신앙이 구라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고. (2024년인 지금도 대한민국의 정치인 재벌 들이 점을 보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윤회를 부정하지는 않되, 해탈을 위한 방법론으로 고행 소용 없는 짓이니 하지 마라. 그리고 대신 지금 삶에서 지킬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수행의 방법들을 제시하며 마음의 고통을 그나마 좀 덜 수 있는 대안들( 무아나 연기론같은)을 제시한 무신론적 철학자였다>입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불교라는 종교를 탄생시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