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하루키의 저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온 문장이다. 하루키는 이 문구를 어느 마라토너에게서 가져왔다고 했다. 달리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 괴롭다, 더는 못 뛰겠다"는 생각이 올라올 때, 그는 이 문장을 되뇐다고 했다. 아프다는 건 몸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라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신호를 받은 뒤 무너지는 건 자신의 재량이라는 것. "아프지만, 이걸 내가 어떻게 요리할지는 내 마음이야"라고 주도권을 놓지 않는 것.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말이지만, 사실 이건 스포츠 과학이 진지하게 파고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Tim Noakes는 수십 년간 마라톤 선수들을 연구하면서 기존의 피로 이론이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통념은 간단했다. 근육이 젖산 축적이나 산소 부족으로 실제로 고갈되면 몸이 멈춘다는 것. 피로는 말초적인, 즉 근육 차원의 현상이었다. 그런데 Noakes의 눈에 계속 걸리는 장면이 있었다. 마라톤 41km 지점에서 완전히 탈진한 것처럼 보이던 선수가 결승선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다시 스퍼트를 낸다. 근육이 진짜로 고갈됐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플라시보 카페인을 줬을 때도 퍼포먼스가 올라간다. 뭔가가 더 있었다.
그가 내린 결론이 중추 통제 이론(Central Governor Theory)이다. 피로감은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결과가 아니라, 뇌가 능동적으로 생성하는 신호라는 것. 뇌는 현재의 에너지 잔량, 앞으로 남은 거리, 과거 경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계산해서 "이쯤에서 멈춰야 몸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피로감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근육이 아직 여력이 있는데도. 중추 통제자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미리, 그리고 보수적으로 브레이크를 건다.
이게 맞다면 하루키의 문장은 단순한 정신력 이야기가 아니다. 신체가 보내는 고통 신호(Pain)와, 그 신호에 반응해 뇌가 만들어내는 괴로움(Suffering) 사이에 실제로 간극이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간극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넓어질 수 있다는 것.
이탈리아 출신의 스포츠 과학자 Samuele Marcora는 Noakes와 다른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도 피로에서 뇌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자동으로 작동하는 "중추 통제자"라는 메커니즘을 상정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라고 봤다. Marcora가 주목한 건 자각된 노력감(perceived effort)이다. 선수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힘들다고 느끼는가, 그리고 그 힘듦을 계속할 의지가 있는가. 피로는 자동 브레이크가 아니라 의식적인 저울질의 결과라는 것이다.
두 이론은 결국 같은 현상을 다른 층위에서 설명한다. Noakes는 뇌의 보호 본능이라는 구조를, Marcora는 의지와 동기라는 심리적 변수를 전면에 놓는다. 하지만 둘 다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한계라고 느끼는 그 지점은 근육의 끝이 아니라, 마음이 그어놓은 선이라는 것.
여기에 뇌과학의 관점을 더해보면 '괴로움'의 정체가 더 선명해진다. 뇌과학의 구분을 빌리자면, 고통에 반응해 감정을 쏟아내는 쪽은 본능을 담당하는 오래된 뇌, 변연계다. 인간의 뇌는 이 오래된 뇌 위에 새로운 뇌를 붙이고 연결하면서 확장되었다. 가장 최근의 뇌는 Intelligence를 담당하는 신피질(Neocortex)이다.
오래된 뇌는 위협에 민감해서 조금만 힘들어도 공포와 짜증, 회피하고 싶은 욕구를 즉각적으로 생성해낸다. 과거 인류에게 실패나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에, 아주 작은 고통에도 "당장 멈춰!"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생존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포식자도, 굶주림도 없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오래된 뇌는 여전히 과거의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비상벨을 울려댄다. 죽음의 위협이 사라진 시대임에도, 아주 사소한 불편함에 '괴로움'이라는 감정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신체적 한계로 오인하는 것이다.
마이클 이스터는 <편안함의 습격>에서 이 주제를 여러 면에서 반복적으로 다룬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건 진화가 새긴 본능이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본능을 현실로 만들어줬다. 인류 역사 전체를 하루로 환산하면 그 중 불과 3초에 해당하는 시간, 그 찰나에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편안함을 실제로 누리게 됐다.
그 결과, 우리의 뇌는 조금만 불편하고 힘들어져도 괴롭다는 신호를 보낸다. 임계값이 낮아진 것이다. 이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실제적인 도전을 통해 '이 정도 고통은 안전하다'는 새로운 데이터를 뇌에 입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야생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겁에 질리고 불안에 질린 우리를 구원하는 길.
하루키는 그걸 이미 달리면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프지만, 이걸 어떻게 요리할지는 내 마음이야." 과학이 수십 년을 들여 밝혀내려 한 것을, 그는 42km를 달리며 스스로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