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7장
철학에는 오래된 수수께끼 하나가 있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졌다면, 소리가 났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났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 질문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던진다. 이 물음은 단순한 철학적 유희가 아니다. 소리, 색깔, 그리고 감정이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통해 배럿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우리가 당연히 실재하다고 여기는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라는 것
나무가 쓰러지면 공기가 진동한다. 이것은 물리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 진동이 '소리'가 되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바로 그 진동을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귀와 뇌가 있어야 한다.
공기의 진동 자체는 소리가 아니다. 귀의 달팽이관이 그 진동을 신경 신호로 바꾸고, 뇌가 그것을 '쾅' 하는 소리로 해석해야 비로소 소리가 된다. 숲에 아무도 없다면, 공기는 진동하지만 소리는 없다. 정확하게는, 소리를 만들어낼 지각하는 주체가 없다. 지각하는 귀와 뇌가 없다면, 그곳엔 오직 고요한 공기의 파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당신 앞에 사과가 있다. 당신은 그것이 빨갛다고 본다. 하지만 사과에는 빨간색이 들어있지 않다. 사과 표면의 분자 구조가 특정 파장의 빛을 반사하고 나머지를 흡수할 뿐이다.
그 반사된 빛이 눈의 원추세포에 닿고, 신경 신호로 변환되고, 뇌가 그것을 '빨강'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킬 때 비로소 빨간 사과가 된다. 빨간색은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낸 것이다. 완전한 색맹인 사람에게 그 사과는 빨갛지 않다. 다른 동물에게 그 사과는 또 다른 무언가다. 빨강은 보편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뇌가 특정한 빛의 파장에 부여한 해석이다.
소리와 마찬가지다. 물리적 현상은 있다. 그러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각하는 뇌다.
그러나 배럿의 수십 년간의 연구는 다른 결론을 가리킨다. 분노에 해당하는 특정 뇌 회로는 없다. 공포를 전담하는 생물학적 지문도 없다. 수천 건의 신경 영상 연구를 메타 분석한 결과, 같은 감정을 경험할 때도 뇌의 활성화 패턴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랐다. 감정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배럿에 따르면, 뇌는 신체 내부와 외부의 신호들을 받아 끊임없이 예측을 만들어낸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얕아지고, 각성 상태가 높아지는 신체 신호들이 올라온다. 이 신호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몸의 상태를 알리는 데이터일 뿐이다.
뇌는 과거의 경험에서 구축된 감정 개념을 가져와 이 신호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 상태는 설렘이다.' '이것은 공포다.' '이것은 분노다.' 감정 개념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개념이 없으면, 그 신체 상태는 그냥 막연한 불쾌함이나 알 수 없는 긴장(Arousal)으로 남는다.
이것이 소리와 색깔의 이야기와 정확히 같은 구조다. 신체 신호라는 물리적 현상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감정'으로 만드는 것은 뇌가 가진 개념이다.
그런데 여기서 배럿은 더 흥미로운 지점으로 나아간다. 소리와 색깔은 개인의 뇌가 구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사회적 합의, 집단적 지향성(collective intentionality)이다.
우리가 '분노'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오랫동안 그 신체 상태를 '분노'라고 불러왔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언어와 문화를 통해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정'이라는 감정 개념이 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문화권의 사람들은 단순히 그 표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으로 신체 신호를 범주화하지 못한다. 개념이 없으면 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럿은 감정을 돈이나 국가 같은 사회적 실재에 비유한다. 돈은 종이 조각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집단적 합의 위에서 돈으로 기능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것이 슬픔이다'라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개념 체계 안에서, 슬픔은 실재한다. 모두가 그 믿음을 거둔다면 사라질 수도 있는 실재다.
세 가지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소리도, 색깔도, 감정도 같은 구조다. 물리적 현상은 있다. 공기의 진동이 있고, 빛의 파장이 있고, 신체의 신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지각하는 뇌이고, 그 뇌가 가진 개념이다.
이것은 세계가 허구라는 말이 아니다. 물리적 현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배럿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그 물리적 현상과 우리의 뇌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구성한 세계를 본다.
그리고 감정에 관해서 배럿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감정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장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수천 년의 사회적 학습과 언어와 문화가 함께 빚어온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가능성이 열린다.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개인은 새로운 감정 개념을 배우고 자신의 감정 어휘를 넓힘으로써, 같은 신체 신호를 더 정교하게, 더 유연하게 경험할 수 있다. 사회는 더 풍요롭고 더 정확한 감정 개념을 함께 만들어감으로써,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진다. 공기는 진동한다. 소리는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능동적인 창조인지를 조용히 일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