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에너지를 믿으십니까?
신입사원 시절 이것저것 해보겠다는 심산으로 들어간 독서 모임. 사실 책 자체보다는 수다 떨기 위한 공간임이 확실했다.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를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색하게(?) 나누던 와중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부정적인 편이에요."
그 순간 찾아오는 정적.
나는 애써 해명을 시작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긍정적인 편에 속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뭐든 즐겁게 받아들이는 그런 거요. 그런데 저는 이런 저의 성격이 꽤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요. 그런 게 저를 발전시키기도 하고요....."
주변의 텁텁한 공기가 나를 둘러싸오는 듯한 정적 속에서 나 자신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 조금 당황스러워 제대로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 주제로 넘어갔지만.
그렇다. 나는 부정적이고 어둡기 까지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오해는 사전에 방지해야겠다. 내가 그렇다고 사회 부적응자에 항상 맹수의 눈빛을 한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일례로, 수년 전 소개팅남과의 소개팅 자리에서 소개팅남이 내 카톡 사진을 보고 "완전 다크한 분"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밝은 분이어서 놀랐다고. 그때 카톡 사진이 Portishead의 앨범 Glory Box였다.(그때 당시의 내가 좀 더 다크하긴 했다. 고시생이었어서...) 참고로 Glory Box는 영국 어딘가에, 담배냄새가 찐득하게 배어 있는 그런 언더그라운드 바에서 흘러나올 거 같은 노래다. 사족이지만 그는 "음잘알"의 방송국 피디셨다. 잘 지내시나요?
나는 종종 나란 사람은 왜 부정적일까? 생각해보곤 한다. 아무래도 나의 소심하지만 관종이었던 성격에 기인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그 와중에 친구들에게 인기도 있고 싶고, 부모님 선생님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니 이 사회에 갖는 불만이 얼마나 많겠는가.
모두가 그렇듯 나 자신을 찾아가는 시기는 당시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지나고 보면 감사한 시절이다. 고등학생 때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정치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사건들에 분통이 터졌다. 아침마다 신문을 탐독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외로움에 더 파고들었다. 부모님 몰래 방 안에서 담배 한 모금에,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 케이크 한 숟가락씩 퍼먹고 했던 적도 있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내가 이렇게 평생 회사를 위해 살아야 하나"하고 매분 매초 고민한다.
지나고 보면 뭐가 그렇게 부정적이었나 싶기도 하다. 시각을 180도 아니 90도만 돌려봐도 꽤나 행복한 삶이었다. 여러 종류의 신문을 탐독할 수 있는 환경이어서 감사했고, 오히려 주변에 좋은 사람들과 배울만 한 사람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나 자신이 더 외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를 항상 염려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다.
나도 저런 "감사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열에 한 번은 한다. 환기를 위하여.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원동력은 아닌 것 같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부정의 에너지"다.
나는 정치인들의 멍청함과 이 사회의 이기주의자들에 분노하였기에 꿈을 키울 수 있었다. 나는 외로움에 파고들었기에 다양한 음악, 영화, 책들을 접하고 나의 감성의 넓이와 깊이를 더 확장시킬 수 있었다. 나는 매 순간 현재의 업에 대해 고민하기에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부정의 에너지의 핵심은 "성찰"에 있는 것 같다. 통근을 할 때, 산책을 할 때 현재 갖고 있는 문제의식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의 앞날에 관한 것들도 있고, 나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관한 것도 있고, 가끔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현재에 만족하지를 못하고, 꼭 아픈 부분을 끄집어 내 후벼 판다. 이런 자해적 행위를 하지 않아보려 해도, 그렇지 않으면 내 자신이 너무 멍청해지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맞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고 어쩔 수가 없다.
이 글 자체가 너무 부정적일까 봐 갈무리 겸 다시금 오해를 방지해야겠다. 나는 "부정의 에너지"를 믿는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지 않다. 항상 결핍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도 나의 이러한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종종 까탈스러운 내가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나를 믿어주고 또 도리어 나에게 자극을 받기도 한다. 예외 분야가 있다.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는 애정만큼은 문제의식 갖지 말고 곧이곧대로 느끼고, 표현하자.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