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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Jun 07. 2020

당연하지 않은 내 엄마의 김밥

직장인의 코끝을 찡하게 하는 고추냉이 참치김밥

엄마의 도시락은 늘 당연한 것이었다. 노란 옷 입고 짝꿍 손잡고 다닐 그 시절, 내 소풍 도시락은 김밥이었다. 종종 유부초밥을 싸주실 때도 있었는데, 나는 유부초밥을 좋아하진 않았다. 밥만 들어있는 그 단조로운 구성이 싫었던 것 같다. 김의 고소함, 단무지의 아삭함, 계란의 폭신함, 여타 채소들의 풍미와 식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김밥이 훨씬 좋았다.


그 시절 소풍 도시락 메뉴의 99%를 차지하는 음식은 단연 김밥 일지어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에 맨손으로도 먹을 수 있어 야외에서 먹기에 간편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탄단지+채소의 영양소를 모두 잡으면서 다채로운 맛과 식감을 즐길 수 있는 메뉴라니. 세상에 이런 음식이 또 있을까?


하지만 김밥이라는 음식 안에서 변주는 다양하다. 요즘 유행하는 특이한 메뉴를 선보이는 맛집 김밥을 떠나서, 유년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라도 집집마다 그 맛이 다 다르다. 우리 엄마의 김밥은 약간 슴슴한 편이었다. 그 김밥은 약간 심심한 것 같으면서도 계속 손이 가는 맛이었다. 어릴 땐 그 참맛을 몰랐는데... 가끔은 파는 김밥을 사 온 친구 걸 빼앗아 먹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김밥 맛이 날 길들인 건지, 내 입맛에 맞게 엄마께서 싸주신 건지 앞뒤는 차치하고, 엄마표 김밥만이 내 입맛에 최적화된 것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김밥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음식인 것 같다. 모양을 어떻게 잡을지부터 어떤 김을 쓸지, 밥은 어떻게 짓고 어떻게 간을 할지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서부터 승패가 결정될 때도 있다. 엄마께선 그날의 밥과 김만 맛있으면 그 안에 김치 한 줄 툭 넣어서 한 끼를 해주실 때도 있었으니까. 심지어 잘라주지도 않으신다. 그래서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김치가 전부 딸려 오기도 한다.


엄마가 김밥을 싸주시는 모습을 떠올리면, 해가 아직 다 뜨지도 않은 어스름한 새벽 시간이 배경으로 깔린다. 가족들이 깰까 봐 부엌에 불도 제대로 켜지 않으시고 김밥을 열심히 말고 계신다. 사 오신 재료들도 다 쓸 겸 가족들 모두 먹일 겸, 그날 식탁에는 김밥이 케이크처럼 층층이 쌓인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갓 만든 김밥은 언제나 꿀맛이다. 한번 먹으면 멈출 수가 없다. 식어도 맛있다.


난 지금 직장인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엄마께서 도시락을 싸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엄마표 반찬에 진미채, 고추참치 볶음 등 몇 개가 있지만 단연 일등은 김밥이다. 요즘은 참치 김밥을 자주 싸주신다. 김 한 장을 이등분해 더 이상 썰어 먹을 필요 없는 크기의 이 김밥은 기본적 재료에 고소한 참치와 부드러운 마요네즈 그리고 알싸한 고추냉이가 조금 첨가된 더할 나위 없는 메뉴다. 그렇지. 어린이 시절과 달리 성인에겐 자극적인 맛이 필요하다. 한 번은 고추냉이가 한꺼번에 몰려있어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노리신 걸까. 회사에서 정신 차리라고.


모녀 지간의 다툼이 있고 난 후에도 엄마는 말없이 이른 아침부터 내 도시락을 싼다. 나는 엄마가 밉다가도 도시락을 싸주시는 엄마의 정성을 생각하면 이내 마음이 풀린다. 김밥 도시락을 싼 날에는 오전 내내 기분이 좋다. 점심시간이 기다려진다. 엄마의 김밥 도시락은 당연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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