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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중국인 친구들에게 주눅들던 날

[프랑스 교환학생기] 4. 스트라스부르 생활의 시작과 중국인 친구들

by 정일홈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집은 9평 남짓의 원룸이었다. 집은 외부나 내부나 모두 낡았지만, 그럭저럭 살 만했다. 단점은 1층이라는 점이었다.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자칫하다간 길거리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지 다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에서도 자취해 본 적이 없는데, 프랑스 땅에서 자취를 하게 되니 나름 설레는 면도 있었다. 세간 살이 하나 없이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공간에서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한 겨울의 프랑스 땅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이불 하나를 두르고 오묘한 기분에 휩싸여 잠을 청했다. 익숙하던 곳에서 떨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쉽지만은 않다.

해야 할 것이 많았던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학교 오피스로 향했다.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지 못했음을 설명하고, 거쳐야 하는 행정 절차를 물으러 갔다. 대체 이십 여 년간 배운 영어는 대체 무엇을 위한 영어였을까. 외고씩이나 나오고 교환학생 온다고 토플도 치렀는데, 회화 실력은 아주 떠듬떠듬. 읽기나 듣기로는 다 아는 단어가 말로는 나오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나는 할 말을 항상 '작문'해놓았다. 오피스에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

말해야 할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현대인의 필수 앱 구글 맵에 의존하며 오피스를 찾아갔다. 여긴 하나의 캠퍼스에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게 아니라, 도시 곳곳에 단과대학들이 퍼져있고,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길을 헤매다가 겨우 오피스를 들어갔을 때 나는 반가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중국인 친구들.

네 명의 중국인들이 있었다. 넷은 친구 같았는데, 둘은 나처럼 신입이고, 둘은 이미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신입 둘은 나와 비슷한 사정이었다. 오티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거기에 숟가락만 얹으면 됐다.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합류해 행정 처리를 밟으러 또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일생일대로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여자 셋에 남자 하나였다. 여자들은 모두 안경을 끼고 있었으며 그중 한 명은 아주 똑부러지는 인상을 갖고 있었다. 남자 한 명은 키도 아주 컸으며 매우 착해 보이는 인상의 친구였다. 그들은 내게 아주 친절히 대해줬고 나는 그들의 환대에(그들도 같은 교환 학생인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중국인 친구들은 나에게 착실히 말을 걸어 주었는데, 나의 허접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대화가 제대로 진전되기가 힘들었다.

중국인 친구(남자) : 나 빅뱅 좋아해, 얼마 전에 유럽 공연도 다녀왔어


나 : 와 유럽 공연 대박이다. 나도 빅뱅 콘서트 간 적 있어. 그런데 남잔데도 빅뱅 좋아하는 거야? 신기하다.


중국인 친구(남자) : 아 2NE1도 좋아해. 그들 만의 개성이 좋아.


나 : 맞아 맞아. 나도 2NE1 좋아해.

....


중국인 친구(여자) : 여긴 나무가 특이하게 생긴 것 같아. 처음 보는 나무야.


나 : 그러니까! 특이해!

....


나 : 대학 전공 시간에 한자로 된 시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여기서 '한자'를 영어로 생각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국인 친구(여자) : 오 그래? 어떤 걸 배우는 거야?


나 : 어...음...



교환학생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자괴감을 맛 본 날이었다. 여태까지 내 영어는 항상 시험을 대비한 영어였고, 미리 준비된 영어였다. 외국인과 대화도 해보고, 시험들도 꽤나 잘 치러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은 실전에서 발휘되기엔 부족한 실력이었다.

어색함과 자괴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걷자니, 몇 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대화가 끊겼을 때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보도블록 문양을 분석하거나, 마음은 옴짝달싹 못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도시 풍광에 빠져든 척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간을 겨우 견딘 후 오피스에 도착해서는 학생증을 발급받고 기타 앞으로 또 필요한 서류들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외국에서 학생증을 받으니 뿌듯한 기분이 들어 무너졌던 자존감이 조금이나마 회복이 됐다. 앞으로 나의 교환학생 생활은 이렇게 휴지조각 뒤집듯 자존감과 자괴감이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한 시름 놨으니, 같은 대학교에서 스트라스부르로 함께 오게 된 언니를 만날 여유가 생겼다. 같은 학교에서 오게 된 것도 인연인데 말이다. 교환학생 생활에선 한국인들과의 교류도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 같이 한국어로 왕창 수다도 떨고, 언니가 이것저것 도움도 주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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