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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Apr 30. 2021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만난 변태, 레미제라블보며 울기?

[프랑스 교환학생기] 18. 런던 다섯째 날

오늘의 하루는 세인트제임스파크역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시작했다. 파니니 하나와 플랫 화이트라는 커피를 시켰다. 라떼의 일종인데 우유보다 커피의 비율이 더 높은 커피라고 한다. 나는 런던 종업원들이 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스타벅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시간의 한적한 런던 도심 속 스타벅스에서 햇빛을 쬐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으니 여유로움에 취하는 듯했다.


 

스타벅스에서 나와 세인트제임스파크를 거닐었다. 유럽의 하늘은 높고 청명하다. 세인트제임스파크도 파란 하늘 아래 아침의 찬 공기와 햇살이 어우러져 공원의 수목들이 더욱 그 고유의 향을 발현하도록 돕고 있었다. 사람도 없어 혼자서 산책하기에 좋았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오리 친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세인트제임스파크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버킹엄 궁전이다. 영국의 궁전과 공원이라. 단어의 조합만 들어도 너무 우아하고 근엄하게 잘 정돈된 풍경이 떠오른다. 내 상상은 현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버킹엄에서 근위병들의 교대식을 관람했는데, 말 위에 타있는 근위병들을 보자니 런던이 얼마나 전통을 중시하는지 그리고 왜 중시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버킹엄 교대식에 몰려든 우글우글한 인파들이 가져다주는 수입. 친구 말로는 영국은 관광 수입 세계 2위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갤러리. 이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마치 런던의 중심부에 온 기분이 든다. 여기서는 나의 또 다른 친구와 접선을 하기로 되어있다. 반가운 재회를 한 우리는 트라팔가 광장 분수에도 올라가고 택시 앞에도 서는 등, 온갖 포즈를 취하며 신나게 사진을 찍고 난 뒤 내셔널갤러리에 들어갔다. 내셔널갤러리에 유명한 작품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있는데 다른 곳으로 출장을 나가 있어 보지 못했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줄이 너무 길어 보지 못했다. 난 대신 보티첼리의 작품을 인상 깊게 감상했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의 보티첼리 작품들은 인물들의 풍만한 몸매가 주는 리얼리티와 작품의 내용이 담고 있는 판타지의 간극에서 즐거운 감상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다.

 


한창 작품 감상을 하던 중 마르세유에 사는 어떤 프랑스 남자가 내게 아티스트냐며 말을 걸어왔다. 이쯤 되면 프랑스와 지독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닐까?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눈빛부터 게슴츠레한 것이 변태 기질이 느껴져서 슬금슬금 피해버렸다. 유럽에선 변태들마저 갤러리에서 작업을 거는 걸까? 신선한 충격이다.



나는 갤러리에 있는 아트샵에서 엽서를 사 모으는 걸 좋아한다. 명화를 소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실제로 꽤 큰 크기의 엽서는 액자에 넣으면 인테리어로서도 아주 완벽하게 기능한다. 나는 어김없이 내셔널갤러리에서 엽서 쇼핑을 했다. 엽서를 잔뜩 들고 캐셔 앞으로 가서 계산을 하는데, 분명 이 엽서들은 할인 중이라고 봤는데, 캐셔가 할인된 가격을 적용해주지 않는 게 아닌가? 내가 따지니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다시 계산해준다. 그 캐셔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지독하게 일하기 싫은 아르바이트생이길 바란다.

 


이날의 고행은 내 한쪽 눈이 렌즈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일어났다. 계속 한쪽 눈이 아리고 아프더니 결국 렌즈를 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경도 숙소에 두고와 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안약이나 인공 눈물을 넣어보려고 약국에 들러 친구와 함께 손짓 발짓으로 설명해 무언가를 사 왔는데, 알고 보니 렌즈 세척액이었다. 젠장. 나는 결국 남은 하루를 한쪽 시력을 포기한 채 보내야 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아시안들이 정말 많은 '버거앤랍스타'에 갔다. 개인적으로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런던만의 느낌이 나지 않는 그저 그런 식당이었고 맛도 평범했다. 저녁 식사 후에 뮤지컬을 보기 위해 이동했다. 레미제라블을 보기로 했는데, 도착한 곳엔 극장이 없었다. 구글맵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국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덕분에 택시를 유럽에서 처음 타보게 되었다. 런던의 명물로 불리는 런던 택시 ‘블랙 캡’은 동그란 헤드램프와 클래식한 라디에이터 그릴, 육중한 차체로 그 개성이 뚜렷하다. 택시 기사들도 특별 시험을 거친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택시 경험을 뒤로하고, 우리는 1막이 이미 시작한 이후에 극장에 도착해버렸기에 그전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2막부터 극장 안으로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다.

 


내 눈은 여전히 아팠다. 레미제라블의 내용이 쉽지는 않아서 영어도 잘 들리지 않았다. 2막과 1막의 순서가 바뀌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할 것 같은 수준이었다. 나는 뮤지컬을 보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옆 자리 사람은 내가 슬퍼서 우는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뮤지컬 관람이었다. 뮤지컬이 막을 내리고 우리는 펍에 들려 간단하게 수다를 떨다가 가려고 했는데, 문을 연 펍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열두 시를 넘으면 슈퍼에서 술도 팔지 않는다. 술장고들의 문이 굳게 잠겨 있는 모습을 보니 가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젊었다. 내가 묵는 호스텔 지하 주방에서 국적이 불분명한 싸구려 컵라면을 끓여먹으며 새벽 5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연애, 진로, 자본주의까지. 한국어로 오랜만에 수다를 떨 수 있어서 속이 다 뚫리는 느낌이었다. 친구와의 여행의 장점은 누구도 우릴 막을 자가 없으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로운 대화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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