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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Jun 05. 2021

울적한 날은 파리 퐁피두 도서관에서

[프랑스 교환학생기] 23. 나의 첫 번째 파리4

감기가 심해졌다. 그래서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내 엉덩이를 걷어 차기 직전이 다 돼서야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어젯밤 계획은 이것저것 짜 놨는데 그냥 퐁피두 센터만 가기로 했다. 퐁피두 센터는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때 건립된 것으로, 건물 외부로 지지 구조와 파이프가 드러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철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퐁피두 센터의 미적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갑론을박인 듯 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이 가지 않았다. 파리 시내가 거의 옛 것을 따르고 있으니 두 개 정도는(에펠탑, 퐁피두)  철제로 되어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피곤한 나머지 그마저도 박물관은 못 가고 도서관만 갔다. 그것도 나름 좋았다. 사실 도서관은 나 혼자 오롯이, 무언가로 깊숙이 파고들고 싶을 때 찾는 곳 중 하나다. 단 대학 도서관 수준으로 큰 곳이어야 집중이 잘 된다. 인구 밀도가 높으면 도서관만의 선선한 공기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책 냄새보다는 사람들의 날숨 냄새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 코너에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고 서가가 도서관 구석진 곳에 있어서, 바닥에 앉은 채로 서가에 기대 책장을 휘리릭 넘길 수 있다. 오늘도 예술 서가에 가서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La musee d'art라는 책이었다.

 

아티스트들을 A to Z로 정리한 책인데 책장을 넘길수록 26가지는 거뜬히 넘어갈 만큼 여러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이닥쳤다. 이 몇 달간의 여정에서 정말 감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지금과 같은 순간이다. 전구에 스위치를 켜듯 생각에 불을 켜준다. 그 빛은 한 없이 퍼져나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도서관엔 앉을자리가 없었다. 많은 프랑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데서 공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가 계속하고 싶어 지겠지’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아닐 것 같다. 항상 남의 떡만 커 보이는 것은 진리다.

 

퐁피두 센터를 나가려는데, 센터 바닥에 드러누워서 뭔가 알 수 없는 퍼포먼스를 하는 여자를 보았다. 좋게 말해 퍼포먼스지만, 약간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사람 같았다. 그녀는 차가운 바닥에 누웠지만 마치 제 집처럼 편안해 보였다. 허공을 향해 팔을 90도로 치켜들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저지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똘레랑스인가? 센터 바깥 한쪽에선 어떤 할아버지가 비둘기들의 예수님이 되어있었다. 모이를 뿌리는 바람에 할아버지 반경 10m에 비둘기가 빼곡했다. 마치 비둘기 입체 타일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의 카페테라스는 빈자리가 드물었다. 미국 문물의 거성 스타벅스도 물론 테라스를 내놓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아이의 옷깃을 여며주는 장면을 목격했다. 컨디션도 좋지 않은 채로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부모님이 떠오른다. 한국을 떠나기 전엔 부모님과 싸우기만 하다 왔다. 나는 또 쉽게 그리움과 동시에 죄책감에 빠지지만 끝내 부모님께 연락의 제스처를 취하진 않는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저녁에 숙소에 들어오니 새로운 한국인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인지 새로운 사람과 거쳐야 하는 그 과정이 싫었다. 까칠해 보였으려나. 아무튼 별에서 온 그대를 한 편 보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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