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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Jul 01. 2021

프랑스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

[프랑스 교환학생기] 29. 스트라스부르 현대 미술관

우리나라 의정부시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스트라스부르에는 꽤나 양질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있다. 알자스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 파인 아트 박물관 등 교육 도시답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박물관들이 있는데 나는 뭐니 뭐니 해도 보방 댐 옆에 있는 Strasbourg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이하 현대미술관)를 가장 사랑했다.

 

처음 현대미술관 가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도 오고 흐린 날에는 박물관이나 쇼핑몰같이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여행자들의 정석. 비가 쓸쓸하게도 내리던 그날 나는 버스를 잡아타 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사실 이날이 스트라스부르 안에서는 처음으로 버스를 탄 날이었다. 트램이 워낙 발달되어 있어서 버스 탈 일이 없었던 것.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길을 따라 구석구석 동네를 돌다 보니 스트라스부르의 새로운 면모가 보였다.

 

현대미술관은 스트라스부르의 외곽 쪽에 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갈리아에서도 20분은 달린 것 같다.(20분이면 많이 간 것이다. 20분이면 독일까지도 갈 수 있다.) 그 일대는 주택이 많지 않고 주로 큰 건물들이 있거나 휑한 도로만 있는 동네였다. 특히 스트라스부르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보방 댐'이 있는 곳이다. 이 댐을 담은 스트라스부르 사진은 관광 홍보용으로 많이 쓰인다. 인적은 드물고,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마치 중세의 성벽같이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우산 아래로 뚫고 들어오는 비를 맞으면서 내 자신이 처량하게마저 느껴진다. 역시 날씨가 구질구질한 유럽 북부 지역에서 철학이 발달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선 현대미술관의 외관부터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통유리로 된 현대적인 디자인의 건물이 존재감을 뽐낸다. 하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도, 작지도 않아 무해하게 느껴진다. 미술관 앞에는 유구한 역사를 담은 일강과 보방 댐을 끼고 있어 과거와 현대가 우아하게 교차하는 듯하다. 조명을 은은하게 받으며 음침하고도 고고하게 서있는 설치 미술들은 미술관의 격조를 높여주고 있다. 비가 와서 안 그래도 어둑한 날씨에, 밤이 깊어질수록 하늘은 까매지고 조명은 더욱 밝아온다. 주변의 모든 것들은 고요하고 오직 미술관 건물, 그 안에 보이는 작품들, 그리고 환한 조명만이 무언가를 말해온다. 비 오는 날 현대미술관을 산책하던 그날의 감각은 내게 소중한 자산 중 하나다.

 

추운 몸을 이끌고 후다닥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유럽 학생증으로 당당하게 미술관에 입장한 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거대한 그 공간을 홀로 실컷 누빈다. 프랑스어로 되어 있어 어떤 전시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꽤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총집합해 있었다. 진품 여부는 모르겠으나 칸딘스키와 같이 누구나 쉽게 알 만한 작품들이 많았다. 아무런 기대 없이 방문한 곳에서 익숙한 작가들을 만나니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스트라스부르는 큰 도시가 아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미술관 전체에 관람객이 세 명 정도뿐이었다. 그렇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모두 양질의 것들이었다. 한국에 내가 사는 도시는 규모가 스트라스부르보다 훨씬 큰 편인데도 현대미술관은 없다. 그나마 있는 전시관에서 하는 전시들도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전시를 그렇게 좋아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땅거미가 더욱 내려앉아 혼자 걷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이 더욱 흥미로웠다. 저 멀리서만 비춰오는 가로등의 빛을 유일한 광원으로 삼아, 일강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들이 잘디 잘은 다이아처럼 반짝이고 있다. 비가 와서 온 도시가 축축했고 어둠에 덮인 축축한 도시가 주는 기운이 내겐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후에도  번을  현대미술관에  홀로 방문했다. 혼자 미술관에 가는  추천컨데 정말 최고의 경험이다. 마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준비된 것만 고 그것을 또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오는 날도 좋았지만 맑은 날에 갔을 때의 미술관은 잿빛 표정을 벗고 해사한 얼굴을 말갛게 드러내고 있었다. 미술관 야외 마당에서는 젊은 학생들이 보드를 타고 있었다. 상의를 벗고  모자를  소년들이 우쭐거리는 듯이 보드 기술을 연습하는 모습이 마치 청춘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같다. 금발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동여맨 소녀들은 쪼그려 앉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린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현대미술관은 미술을 넘어서서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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