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풍경을 내 집으로 가져오는 삶
전주는 전라남도나 경상남도에 비해 마냥 가깝게만 생각했는데, 인천터미널에서 세 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꽤 긴 시간이죠. 세 시간을 버스에서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니 맑은 날씨의 전주가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사실, 전주 여행을 추천하는 사람은 꽤 있었지만 제 여행 위시리스트 상위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블로그를 찾아봐도 '한옥마을이 너무 상업화 되어서 별로다'라는 후기들도 제 기대치를 낮추는데 한몫 했습니다.
하지만 여행은 정말 날씨가 다 일까요?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날씨가 눈이 부시게 맑았습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금상첨화였지요. 거리의 풍경은 제게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와를 제 머리로 삼고 있는 한옥들과, 큰 빌딩 없이 주변의 산과 하늘이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시골 할머니댁과 같이 친근했습니다. 반면, 황토색으로 통일된 한옥의 색들과 이리저리 잘 구획된 거리들, 그리고 같은 메뉴가 반복되는 음식점들과 호객하는 한복 대여점의 상인들의 모습은 꽤나 이질적이게 다가왔습니다. 어찌보면 '너무 상업화'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제겐 '생각보다는 덜' 상업화 되었다고 느껴졌습니다. 너무 도시에 찌들어서 그런 걸까요?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수학여행 철이라 그런지 한복 체험을 하는 중학생들이 거리를 왁자지껄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골목을 하나만 더 들어가게 되면 그런 소란은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아주 조용하고 소담스러운 게스트하우스와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는 햇살이 잘 드는 마당이 예쁜 곳이었는데, 주인은 잘 드나들지 않는 게스트하우스 같았습니다. 게다가 평일인 덕에 다른 손님들도 없어, 한옥 전체를 저희가 전세낸 것처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봤을 땐 방이 조금 답답해 보여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였습니다. 천장도 높고 뚫린 창문으로부터 햇살과 바람이 적당히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짐을 풀고 나서 본격적으로 한옥마을을 걸어다녔습니다. 첫 식사 메뉴는 칼국수와 메밀 소바. 칼국수는 고소함에 매콤함이 가미된 독특한 국물이었고, 메밀소바는 너무 슴슴하지도 너무 짜지도 않은 제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간이었습니다. 여행에 와서는 위가 쉴 틈이 없죠. 그 다음은 테라스가 있는 가게에서 얼음맥주라는 걸 사먹었습니다. 사실 별반 다를 바 없는 맥주 맛이었지만, 햇살이 내리 쬐는 오후 한옥과 푸르른 나무들 사이에서 마신 다는 사실이 절 무척이나 행복하게 했습니다. 간식은 많이는 먹지 않았고, 임실 치즈 구이 하나를 먹었는데 이것도 생각보다 맛있었습니다. 고소하고 식감도 쫀득하니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더라고요!
먹었으니 움직여야지요. 한옥마을 바로 옆에 있는 오목대로 올라갔습니다. 높이는 거의 동산 수준이라 등산을 별로 안 좋아하는 제게 아주 딱이었습니다. 오목대에 올라가니 널직한 정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쌍의 커플, 두 여자 외국인, 그리고 저희까지 각자의 공간을 갖으며 휴식을 취하기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늘어진 나뭇가지에 붙은 이파리들이 바람에 쓸리고, 햇살이 그 사이 사이를 지나가는. 조금 부끄럽지만 저도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로 바람을 느꼈습니다. 참고로 오목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 입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라 합니다. 치열했던 전쟁의 승리를 축하했던 곳이 이제는 평화로운 휴식처가 되고 있다는 것이 새삼 세월의 풍화를 깨닫게 합니다.
오목대 바로 옆에는 전통 공예품을 전시함과 동시에 판매도 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곳 또한 너무나 깔끔하고 조용해 별 생각없이 들어갔는데, 물건들이 너무 아름답고 고급스러워 놀랐습니다. 가격대도 놀라웠고요. 저는 조명이나 테이블류가 특히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북유럽 스타일 저리가라예요. 한국적 인테리어에 앞으로 관심을 가질 것만 같습니다.
그것 조금 돌아다녔다고, 다시 숙소에 와서 뻗었습니다. 세상 그 어느것보다 달콤했던 낮잠을 잤습니다. 바깥 골목과 통하는 창문은 조금 열린 틈으로 햇살과 바람을 방안에 채워주었습니다. 어렸을 적 할머니 댁에서 낮잠 잤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파트에서만 살다 보니, 바깥 풍경을 집으로 들여오는 것의 소중함을 잊고 지냈습니다. 햇살과 바람 뿐아니라, 공방에서 작업을 하는 소리,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 소리, 새소리 등 그 모든 것들 말입니다. 이 공간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 존재하는 느낌.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이번 전주여행에서 얻게 된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녁 식사는 비빔밥으로 골랐습니다. 육회비빔밥이었는데, 간도 짜지 않고 적당하고, 밑반찬들도 다 하나 같이 맛있었습니다. 고추부각도 처음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흔히 먹을 수 있던 누룽지도 여기선 어찌나 맛있던지요. 사장님이 직접 비빔빕을 비벼 주시는데 스킬이 아주 남달라 보였습니다. 평소 먹는 양보다 훨씬 배부르게 먹고 나니 까만 밤이 내려 앉았습니다. 한옥마을의 밤은 한옥에 비춰진 조명에 반사된 황토빛이 까맣고 까만 밤하늘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한옥마을을 걷다가, 주변 상점들과 달리 담장이 높고 또 키가 큰 나무로 둘러 쌓인 집을 발견했습니다. 집도 두 채나 되고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 같았어요. 상업적 시설로만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한옥마을을 더 의미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도시 생활을 하면서 아파트만을 고집하던 제가, 자연, 이웃, 맛있는 고장의 음식과 어우러져 사는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