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일홈 Sep 04. 2021

동화 같은 중세 도시 안시에서의 하루

 [프랑스 교환학생기] 48. 안시


안시는 리옹에서 기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로, 알프스 산맥 기슭, 안시 호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도시다. 중세부터 이어져오는 건물이 많으며, 주변은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천혜의 자연을 끼고 있다 보니 여러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리옹-안시를 함께 여행하길래 별생각 없이 안시를 여행지에 끼워 넣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드는 도시였다.



안시 호스텔에서의 밤은 너무 추웠다. 누가 새벽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놓고 나간 것이다. 너는 더울지 몰라도 나는 춥단 말이다! 아침부터 비도 주룩주룩 내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잔뜩 늑장을 부리다 호스텔을 나왔다. 리옹 온도가 22도라 옷을 얇게 입고 왔건만, 소나기에 바람도 많이 불고 추운 날씨였다. 그래도 여행을 다녀보겠다고 이 날씨에 돌아다닌 내 자신이 대견스러워질 정도였다.

 


안시는 기대감이 없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정말 예쁜 도시로 느껴졌다. 깡시골인 줄 알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게다가 마을이 어찌나 아기자기하고 예쁜지 동화 속으로 뛰어든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스위스 같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아름다운 자연과 오밀조밀한 목조 건물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보니 충분히 납득이 된다(스위스는 가보지 않았지만). 날씨만 좋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날씨가 주는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비가 오는 덕에 도시 곳곳에 잔뜩 물안개가 피어올라 마치 필터를 입힌 듯 도시 전체가 몽글몽글하게 보이고, 안시의 공기 또한 촉촉이 젖어 있어 나를 ‘고독하게 홀로 여행하는 신비로운 여행자’ 컨셉에 취하게 만들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작은 시내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자리 잡았다. 오래된 의자가 삐걱거릴 것 같은 카페 인테리어를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핫핑크 색상의 감각적이면서 현대적인 플라스틱 의자들이 늘어져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오래된 도시에 이런 구조적인 의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조화롭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적 감각에 관해 타고났거나 아니면 전국민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작은 도시의 작은 카페마저 이리 감각적이라니.



날씨가 날씨인지라 거리는 물론 가게에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카페에서 레드 와인을 계피와 함께 끓여낸 음료인 뱅쇼 메종을 하나 시켰다.  오는 안시 거리를 바라보며 뜨거운 뱅쇼를 호호 불며 호로록 마시는  고독함이란. 앞으로 살면서  뱅쇼보다 맛있는 뱅쇼를  만날  있을까?

 


안시는 호수가 유명하다. 걸어가는데  시간이 걸려서 가는 과정은 육체적으로 조금 고됬지만,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니 너른 호수가  반겨주고 있었다.  오는 날이라 안개도 잔뜩 껴있고 시야가  막혀 있어 그런지 왠지 호수 괴물이나 귀신이 튀어나올  같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프랑스인들이 인자한 미소로 눈인사를 건네주어 두려움은 이내 사라졌다. 날씨가 좋았다면 산책하기에 정말 좋았을  같은 곳이었다.

 


추운 날, 비 오는 날,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사실 에피소드나 특별한 기억은 잘 없다. 그저 추위에 떨며 골목골목을 구경하고, 도시 특유의 느낌을 차분하게 들이마신다.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날의 쓸쓸한 느낌과 따뜻한 음료, 빵 같이 나를 채워줬던 것들이 오롯이 내게 남는다. 리옹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전 카페에 들려 커피와 뺑 오 쇼콜라를 먹었다. 추운 거리에서 도망쳐 따뜻한 곳에 앉아 음료를 호호 불며 마시고 먹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의 감각이 바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하다.

 


기차를 타고 다시 안시에서 리옹으로 넘어오는데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호수인지 강인지 모를 곳을 지나왔는데, 마치 내가 물 위를 지나는 것 같이 호수가 선로와 아주 가깝게 있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내가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한 연유에서 유럽 여행을 하는 동안은 한 번도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다시 리옹에서 스트라스부르로 넘어오는 기차역에서는  스노보드와 스키 장비를 들고 스키복을 입은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리옹은 알프스 산맥과 접해 있어 스키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알프스에서 즐기는 스키 라이프라니.

 


이 날 썼던 일기를 보니, '이 순간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고, 내가 인생을 나쁘게 살고 있는 거 같진 않아서 뿌듯하다'라고 적혀있다. 나쁘게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내 삶에 이런 생각을 했던 순간이 있다는 것만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생 떽쥐뻬리의 도시 리옹에서의 유유자적하는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